<성 城>은 주인공 K가 성하 마을에 도착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추운 겨울에 험한 날씨를 뚫고 자신에게 토지측량 업무를 의뢰한 마을에 도착했건만 K에게 돌아오는 건 냉대와 경계뿐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토지측량 업무가 마을엔 필요가 없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마을은 성에 귀속되어 있고, 그 상하관계는 뚜렷하다. 성의 허가 없이는 그 어떤 일도 마을에서 시작될 수 없다. 명령체계의 방법은 뚜렷하지만 그 명령이 전달되는 과정은 복잡하다. K는 자신의 존재 의의(토지 측량사)를 증명하기 위해 성과 맞서려 하지만 성에 닿을 수 조차 없다. K가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성은 멀어만 간다. 마을 주민들은 성에게 완벽하게 굴종하고 있기에 성에 대적하려는 K를 피하고 도움도 주려하지 않는다. K는 이 마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지 못했기에 계속 실수를 한다. 이 실수가 쌓여서 그를 점점 더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다. <성>은 K의 몰락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K가 시간이 갈수록 성과 마을에 동화되기에 갈수록 성과 멀어지기 때문이다.
카프카가 20세기 초에 소설로 묘사했던 상황은 현대에도 자주 되풀이된다. 영화 <신세계>에서 이자성이 조직폭력단을 감시하고 와해시키려고 잠입했다가, 결국 조직을 접수하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시스템에 맞서려다가 시스템에 사로잡히는 모습은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시스템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타파하려는 그 조직에게 먹혀버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들과 싸우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그들의 언어를 습득해야 한다(K가 성에 맞서기 위해 성의 논리에 따라 학교 관리인이라는 직업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성의 사람들은 자신의 논리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만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결국 성의 사람들과 싸우기 위해선 뼛속까지 성의 사람들처럼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관습을 익히고 동화되다 보면 그 시스템이 지닌 이점 또한 인식하게 된다. 모든 시스템은 그 나름의 논리와 강점을 갖고 있다. 논리와 강점이 없다면 시스템은 돌아가지 않는다. 처음엔 와해시키려 했던 조직에 순응하고(처음엔 무너뜨리기 위한 필연적 선택이었을지라도) 거기서 나오는 열매를 맛보다 보면 그 맛에 익숙해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 굳이 성과 싸워야 할까, 그냥 프리다와 함께 마을 주민으로서 살아가는 게 행복한 게 아닐까,라고 K처럼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누울 자리가 있으면 눕고 싶고 혹독한 시련보단 따스한 식사를 원하는 게 인간이고 그 누가 그게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다음엔 결국 선택의 문제다. 자신의 편안한 생활을 포기하고 성과의 싸움을 계속 이어나갈 것인가, 아니면 현실에 안주하고 성에게 굴복하고 그 보호 아래 살아갈 것인가. K는 그게 자의던 타의던 결국 싸워보고자 마음먹는다. 그 이유에 대해서 명확히 설명하지는 않지만 그 동기는 자신이 성과 싸우기를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때때로 성의 유혹에 넘어가고 지친 몸에 신념이 흔들리기도 하지만 성이 지닌 필연적 모순성을 의심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밑바닥으로 추락하면서도 맞서기를 멈추질 않는다. 물론 그런 K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마음이 아프다. 말도 안 되게 권위적이고 관료주의적인 성은 독자가 보기엔 비논리적이며 그냥 떠나버리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우리가 떠난다고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K는 그 불합리 속에서도 맞서 싸우기를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K와 같은 선택을 하는 이들을 우리는 삶 속에서도 만난다. 남들이 뭐라 해도 자신이 꿈꾸는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손해를 무릅쓰고 불의와 맞서 싸우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선택이 평온한 삶을 선택한 사람들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가 처한 상황이 있고 우선시하는 가치가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힘은 종종 그런 선택에서 비롯된다.
노트1.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은 안개 낀 항구를 떠오르게 한다. 오기로 약속한 배는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며, 뿌연 빛으로 짙은 안개를 가르는 등대는 영원히 빙빙 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빛은 그 어디에도 닿지 않는다. 멀리서 뱃고동 소리가 들리고 종종 거대한 배의 실루엣이 보이기도 한다. 구름 낀 안개는 걷힐 생각을 하지 않는다. 쌀쌀한 날씨에 코트를 단단히 여며야 한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지만 배는 절대로 항구로 정박하지 않는다. <소송>, <변신>, <법 앞에서>, 그 외 단편집 그리고 <성>을 읽으며 느꼈던 심상은 위와 같다. 어디에도 닿을 수 없다는 체념과 절망이 느껴진다. 그 마음은 이야기를 읽는 내내 독자에게 스며든다. 카프카가 그렸던 세상은 왜 그리도 암울하고 답답했을까. 일생 대부분을 프라하에서 지내면서도 독일어로 생활하도록 강요받았던(아버지에 의해) 탓일지도 모르고, 평생 전업 작가가 되기를 꿈꿨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노동 보험 공단에서 일해야 했던 현실(이 역시도 아버지가 강요했기 때문인데, 카프카는 일생 내내 아버지의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탓인지도 모른다(그가 세상을 뜨고 나서야 알베르 카뮈, 사르트르 등에게 발굴되며 조명을 받았고 현재에는 20세기 최고의 작가로 꼽히고 있다). 카프카의 과거사를 차치하고서라도 소설 속에서 그 좌절감은 생생히 느껴진다.
노트2.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도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른바 실존주의에 대한 이야기다. 다만 후대 작가여서 인지, 아베 코보는 카프카보다 개인 실존의 범위를 한걸음 더 나아간다. 카프카는 시스템에 끊임없이 항거하는 모습을 강조하고(모든 작품이 그런 건 아니지만 경향적으로) 아베 코보는 시스템에 순응하는 것까지도 실존이 한 선택이라면 옹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카프카의 선택도, 아베 코보의 선택도 둘 다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두 작가가 모두 매력적으로 다가오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