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제 : Elizabeth Finch
- 줄리언 반스, 다산북스, 2024. 정영목 역
“그대가 이겼다. 오 창백한 갈릴리인(PG – Pale Galilean)이여” (본문 p125) ‘역사가 잘못된 길로 접어든 순간’ (본문 p119) (오~이제 막 기독교에 입문했다면?)
우리 꿈에 등장하는 모든 것은 -인물, 동물, 사물조차도- 꿈꾸는 자의 파편이라고 한다. 그렇게 보면 인간은 꿈에서 조차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지를 들고 다니는 미망의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소설 또한 그러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한다. 작가가 다룬 모든 인물들이 통합되기 위해 이런저런 사상의 대립을 펼치는 전개는 몽상가인 나도 탁월한 소설가가 될 수 있다는 날조된 희망을 갖게 한다.
작가는 엘리자베스 핀치가 되어 ‘문화와 문명’ 강의를 하며, 기독교의 비(非) 문화, 비(非) 문명적인 영향을 이야기한다. 그로 인해 그 이후의 시대가 겪은 피폐한 문화와 문명을 개탄하지만, 급작스러운 EF의 죽음으로 작가는 화자 닐이 되어 EF의 기록물을 탐색한다.
‘J. 서른한 살에 죽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EF가 특별한 관심을 가진 젊은 남자를 상상했다.’ (본문 p92) ‘그러다가 다음 항목을 읽고 즉시 내가 뭘 해야 할지 알았다. - 누군가 존경할 사람을 원한다면 율리아누스를 보라.’ (본문 p120)
그렇게 닐은 로마의 털북숭이 황제 율리아누스가 되어 전장을 누비다 363년 서른한 살에 죽지만, ‘만일 그가 30년 더 통치하여 가독교를 주변으로 몰아냈더라면, (중략) 후세엔 르네상스가 필요 없고 계몽주의가 따로 필요하지 않았을 정도의 ‘이성의 시대’를 이미 살고 있었을 것이다.’ (본문 p160)라는 의견을 제시하며 18 -19세기 율리아누스의 지지자가 된다.
20세기에 이르면 율리아누스의 매력은 약간 흐릿해지는 듯하지만, 예상치도 환영받지도 못한 찬양자가 한 명 등장한다. 바로 히틀러다.(본문 p200) EF의 시선으로 율리우스를 좇던 닐은 히틀러에 이르러 ‘그는 이 황제를 존경했을지는 몰라도 이해하지 못한 게 분명하다.’ (본문 p201)며 율리아누스의 에세이를 마친다.
어쨌든 작가는 닐을 통해 ‘미완성 프로젝트의 왕’ 혹은 ‘지진아’인 자신의 파편을 자백하지만, 이 또한 어떠한가? 우리 모두 그렇게 살아내는 중인 것을....
원제는 Elizabeth Finch. 왜 한국어 제목이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가 되었을까? 나는 이 의문에 답하는 구절을 찾았다. '이렇게 해서 날조된 구절이 다시 날조되는데 이번에는 날조자가 시인이다. 시인도 탁월한 소설가가 될 수 있다.’(본문 p128)
이 책의 매력은 저자가 갖춘 EF의 이성, 신들과 지속적으로 교제하며 살아갔던 율리아누스를 동경하는 삶 그리고 정작 자신의 이름은 거의 드러나지 않은 채 살아가는 많은 ‘닐’의 다양함의 잔치를 즐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