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황당했어. 초면에 다짜고짜 나더러 주민증을 까라고 다그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저야 형님 대접을 해드리자면 일단 연식을 확인해야 해서 그랬지요.”
그래도 정말 당돌했고 어이가 없었지. “
내가 서울 서부지역 아파트 단지 한 곳에서 경비원생활을 이어가던 때였다. 최근 3월 말 기준으로 나이와 근태성적을 따져 근무 중인 대원들 물갈이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같은 조 7 초소와 6 초소에 새로이 보임을 명 받은 재진, 성우 형이 내가 책임지고 있는 초소로 나를 찾아 나섰다. 일종의 전입신고라 해도 무방했다.
꼬마김밥과 딸기를 각각 한 팩씩을 집어 들고 실내공간이 매우 비좁고 환경이 열약한 내 보금자리로 들어섰다. 근무경력 기준으로 따질 때 엄연히 선임자인 내게 이곳 일터 현장 분위기와 규칙, 노하우등에 관한 도움말을 듣고자 했음은 분명했다. 초면에 내가 돌직구처럼 들이밀었으니 재진형의 이런 회고가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야간에 2인 1조로 돌아가는 순찰조에 새로이 내 파트너가 된 재진형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재진형의 연식을 똑똑하게 확인한 즉시 나는 ‘형님’이란 호칭을 쓰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모든 분야의 기준을 우리나라처럼 ‘출생일의 선후’로 따지는 사회도 드물 거라는 별로 달갑지 않은 내 생각에도 나 역시 이런 대세를 거를 수는 없었다.
이 아파트 단지 내 전체 20명 경비원들은 2개 조로 나누어 만 24시간 교대근무를 이어가고 있었다. 야간순찰조는 같은 근무조 대원중 2인 1조로 따로 편성했다. 토요일과 일요일인 주말에 집중적으로 운용되는 재활용품 정리 정리작업은 각초소마다 자신이 맡고 있는 근무자가 오로지 책임을 지는 것이 원칙이었다. 다만 6, 7 초소는 세대수와 재활용품 배출량을 감안하여 둘이서 공동으로 이어가는 독특한 방식이 채택되고 있었다.
본디 경비원의 고유업무에서 빠지는 예초, 전지작업은 물론 재활용품 분리작업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재활용품 분리작업만 따로 떼어내 다른 업체에 용역을 준다는 것도 여의치 않은 것이 현실이었다. 이래서 한두 쪽의 각서에 모든 근무자는 서명한 후 이 업무를 경비원들의 몫으로 하는 것에 합의했다. 이에 관한 보상으로 정식 급여 이외 현금 @만원이 지급되었다. 정규급여일과 다른 특정일에 근무자에게 지급되는 이 현금 @만원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관해 최근 재진형의 아주 근사한 제안이 있었다. 나와 성우형은 이에 기꺼이 동의했다.
“내가 보기에 최작가의 가장 큰 장점을 꼽으라면 콘텐츠가 매우 다양하고 방대한 것을 들 수 있어. 소재와 제재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그 스펙트럼이 아주 넓다는 것이야. 좋은 글을 계속해서 많이 써달라고 내가 항상 응원하고 있어.”
재활용 정리작업에 관한 보상비 3인분을 모아 내가 관리하고 이를 재원으로 점심식사모임을 갖자는 제안이었다. 그 첫 번째 모임인 오늘 점심식사 자리에서 재진형은 쑥스럽게도 나를 치켜세웠다.
“내가 사실 최작가에게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이 한 가지 있어. 나는 전립선암 4기 투병생활을 하고 있고 지금도 항암치료를 이어가고 있어. 리어카에 소형 냉장고를 싣는 일 정도야 아직 해낼 수는 있지. 하지만 작업도중 순간적으로 삐끗하여 관절을 다치기라도 하면 나는 끝장인 거야. 영원히 회복이 어려울 수도 있어서 그래. 이해를 바라고 7초소 성우에게 부탁하면 좋을 것 같네.”
나는 재진형의 이 말을 듣는 내내 나의 두쪽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각 초소마다 기존에 비치되어 있는 이른바 ‘보급형’에 더하여 내가 개인적으로 조달한 소형 냉장고를 내초소에 추가로 배치하려던 했다. 하지만 초소의 내부공간이 워낙 비좁은 탓에 지하실에 자리 잡은 경비원 휴게실로 옮기려던 참이었다. 냉장고의 무게를 나 혼자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지만 부피 때문에 리어카에 싣고 내리기엔 무리가 따를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재진형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전혀 예기치 못했던 충격적인 해명이 되돌아왔다.
우선 그저 단순한 감기 몸살도 아니고 이렇게 엄청난 중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이 극한 직업의 현장에 나선 것도 납득이 어려웠다. 게다가 이런 내색을 조금도 밖으로 내지 않고 있었다니, 나 같은 보통사람의 기준에 비추어보면 정말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순간 나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뒤통수를 갑자기 둔기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부인은 물론 아드님 따님이 모두 기를 쓰고 뜯어말렸음에도 이 극한 직업의 일선 현장에 나선 데는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으려니 했다. 검사, 치료 수술을 위해 병원을 오가는 시간을 제외하곤 대부분 시간을 집에서 보내자면 오히려 ‘딴생각’이 들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신체 정신 건강 모두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이곳에 나오게 된 최종적인 결단의 이유로 보였다. 아직까진 제법 멀쩡한 나로선 매우 부끄러웠고 재진 형의 이런 결정과 극한 직업의 수행에 경외감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3 총사는 아주 재미있고 즐거운 점심 맛집 순례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 자리에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우리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각종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등이 주된 화제에 올랐다.
재진형은 일찍이 규모가 상당한 대북사업체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회장 CEO명함을 가진 명실상부한 오너였다. 그런데 정권이 교체되고 대북사업이 전면적으로 중단되는 바람에 자신이 이끌던 회사를 부득이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이루 말할 수 없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일종의 무용담처럼 우리에게 가끔 들려주곤 했다. 재진형의 인맥이 어마어마했던 것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이 지구상의 모든 이들은 몇 단계의 인맥을 연결하여 건너다 보면 세계 최강국 미국의 현직 대통령과도 이어진다는 세간의 우스갯소리도 있다. 이런 이야기가 실제로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재진형의 인맥과 나의 그것이 제법 겹치기도 했다. 출신학교 학번 등을 들추어내다 보니 그리 되기도 했다.
24시간 맞교대 시스템으로 굴러가는 바람에 이곳 경비원들은 휴가에 대한 많은 제약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재활용품 작업이 집중적으로 이어지는 주말로 휴가 일정을 잡는다는 것은 아예 염두도 낼 형편이 되지 않았다. 무릇 휴가란 게 나 홀로 여행이 될 수도 있겠지만 가족 친지 친구들과 동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보니 주말을 제외한 주중 휴가란 별로 큰 의미가 없었다. 이럼에도 집안의 경조사, 기타 자격시험 응시 등을 이유로 나는 주말로 휴가일정을 부득이 잡을 수밖에 없는 일이 가끔 일어났다.
경비대원 중 한 사람이 휴가를 떠나면 그만큼 업무 공백이 생겨나기 마련이었다. 따리서 이는 남은 대원들의 몫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크고 작은 이벤트가 생길 때마다 나는 재진형에게 자문과 도움을 구했다. 그럴 때마다 내게 좋은 방식과 대안을 일러주었고 때론 응원까지 아끼지 않았다. 재진형은 늘 든든한 내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우리 모두는 밤 11시 전후로 야간 순찰을 돌아야 했고 이 일정이 주말과 재활용품작업시간과 맞물리기라도 하면 그만큼 수면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근로계약서상 주어진 야간 휴게시간 6시간은 많은 부분 잠식당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밤엔 강한 찬바람에 싸락눈이 매섭게 날리고 있었다. 방금 전 나와 같이 야간순찰에 나선 재진형은 몸 컨디션이 급격히 떨어지는 예기치 않은 사태가 벌어졌다. 남은 일정을 내게 맡기고 재진형은 자신의 초소로 복귀하여 휴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런 경우 재진형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었고 내가 재진형을 최대한 배려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