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TURA SEOUL, 2024. 09. 05. – 12. 08.
북촌의 고즈넉한 한옥 사이에 새롭게 자리 잡은 푸투라 서울(FUTURA SEOUL)이 미디어 아티스트 레픽 아나돌(Refik Anadol, b. 1985)의 개인전《대지의 메아리: 살아있는 기록 보관소 Echoes of the Earth: Living Archive》로 그 첫걸음을 내디뎠다. 런던 소재 서펜타인 갤러리(Serpentine Gallery)에서 2024년 초에 공개된 뒤 서울에서 이어지는 이 전시를 통해 아나돌은 '생성 현실(Generative Reality)'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생성 AI가 만들어낸 새로운 차원의 현실을 의미하며, 많은 AI 중에서도 세계 최초로 개발된 오픈소스 생성 AI 모델, ‘대규모 자연 모델(Large Nature Model, 이하 LNM)’이 작품 전반에 사용되었다.
LNM은 스미소니언 박물관, 런던 자연사 박물관 등의 데이터와 전 세계 우림에서 직접 수집한 데이터를 학습한 AI로, 인간의 상상력과 기계의 연상 능력이 만나 탄생한 새로운 창조의 도구다. 이는 AI가 단순한 도구를 넘어 창작의 파트너로 거듭날 수 있음을 시사하며, 아나돌은 기술을 통해 자연을 기록하고 해석하는 방식으로 그 가능성을 탐구한다. 또한 기후 위기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는 자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동시에, 새로운 방식의 자연 감상법을 제시한다.
전시장에 발을 들이는 순간, 관람객은 아나돌이 창조한 자연의 세계로 빠져든다. 약 11m 높이의 거대한 스크린 위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색의 입자들이 춤을 춘다. 이는 5억 개가 넘는 자연 이미지, 400시간 이상 수집한 소리, 약 50만 개의 향기 분자 데이터를 AI가 학습하여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아나돌은 전통적인 작품 제작 도구인 물감과 대비시켜 데이터를 ‘마르지 않는 물감’이라 표현한다.
다만 AI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이 생성 현실의 세계는 완벽하지 않다. 케임브리지(Cambridge) 사전이 AI의 허점을 찌르는 새로운 의미로 ‘환각(hallucination)’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하였듯, AI가 만들어내는 정보에는 오류와 왜곡이 존재한다. 이는 아나돌의 작업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는 이를 창조의 동력으로 삼는다. 인공지능이 스스로 추상적이고 구상적인 꿈을 꾸게 함으로써, 예측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탄생한다. 이러한 접근은 우리에게 깊은 몰입감과 안도감을 함께 선사한다. 거대한 스크린에서 쏟아질 것만 같은 데이터의 폭포가 실제로 우리에게 쏟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더 깊은 감상을 가능케 한다.
1839년 최초의 사진술인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의 발명이 회화에 혁신을 불러일으켰듯, 오늘날 AI는 예술의 패러다임을 뒤흔들고 있다. 19세기 당시 사진술을 접하게 된 화가 들라로슈(Paul Delaroche)가 “오늘부로 회화는 죽었다”라고 선언했던 것처럼, 오늘날 일부 학자들은 AI의 등장으로 인간 예술가의 종말을 예견한다. 그러나 이러한 예언은 오히려 예술의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시대적 맥락 속에서 탄생한 아나돌의 작품은 단순한 기술적 혁신을 넘어 예술 창작의 패러다임 자체를 전복시키는 시도다.
사진술의 등장 이후 모네(Claude Monet)나 모란디(Giorgio Morandi)가 단순한 재현을 넘어 자신만의 자연을 캔버스에 담아냈듯, 아나돌은 데이터와 알고리즘을 통해 자연의 본질을 재해석한다. 이처럼 그의 생성 현실은 단순히 자연의 모방을 넘어서 새로운 시각으로 자연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대지의 메아리: 살아 있는 기록 보관소》는 그저 하나의 전시를 넘어 우리가 생성 현실의 시대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선언과도 같다. 이 새로운 현실은 예술과 기술,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미래를 꿈꾸게 한다. 그리고 그 꿈은 이제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