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붓터치 하나, 혹은 몇 개의 점과 선만으로 이루어진 이우환의 작품은 얼핏 보기에 너무나도 단순해 보입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이들은 종종 “이게 왜 좋은 거지?”라는 의문을 품곤 합니다. 오늘은 이 단순함 속에 담긴 가치를 피워내 이우환이 세계적인 작가가 된 여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우환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화가가 아닌 철학도였습니다. 1936년도에 경남 함안군에서 태어난 이우환은 6.25 전쟁의 혼란이 남아있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그 꿈을 포기하지 않고 195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학과에 입학하였으나, 단 3개월 만에 중퇴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21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그는 숙부의 병문안을 구실로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이동했는데요, 당시 한일 관계가 단절된 상황에서 이는 매우 위험한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일본에 도착한 이우환은 그대로 정착해 1961년 니혼 대학교(Nihon University) 철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이 철학적 배경은 그의 예술 세계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졸업 이후 그는 철학자의 길 대신 예술가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외국인 작가로서 일본 미술계에서 인정받기란 결코 녹록지 않은 일이었기에, 그는 여러 차례 공모전에 낙선하는 좌절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우환이 처음 주목받게 된 계기는 흥미롭게도 그의 회화 작품이 아닌, 일본의 모노하 운동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모노하는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에 걸쳐 일본에서 일어난 미술 경향으로, 일상적인 소재를 거의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제시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우환은 모노하 운동에 대한 비평, <존재와 무를 넘어서 - 세키네 노부오론>을 1969년에 발표하며 “사물 자체로 돌아가자”는 현상학적 자세를 강조하였고, 이후 모노하 운동의 이론적 지주로 부상하며 미술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철학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프랑스 현상학, 특히 메를로 퐁티의 흔적을 이우환의 작품에서 엿볼 수 있으리라 사료됩니다.
이후 그의 독특한 작품 세계와 철학적 깊이는 점차 국제적 명성으로 이어졌고, 오늘날 그는 세계적인 현대미술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우환이 본격적인 작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로, 이 시기에 그의 대표적인 시리즈들이 탄생했습니다. 그중 캔버스에 반복적으로 점을 찍어 만든 <점으로부터 From Point>, 반복적인 선을 그어 만든 <선으로부터 From Line>, 자연석과 철판을 조합한 조각 작품인 <관계항 Relatum>, 한 번의 붓질로 완성하는 <조응 Correspondence> 시리즈를 통해 국경을 넘나들며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예술 세계를 구축해 온 그의 여정을 살펴보려 합니다.
<점으로부터>
먼저 <점으로부터> 시리즈는 이우환이 탐구한 절제된 표현과 존재의 본질이 드러나는 출발점입니다. 한 번의 붓질로 캔버스에 점을 찍고, 그 행동을 반복해 점차 점은 옅어지며 캔버스에서 사라져 갑니다. 이 점들의 생성과 소멸은 단순한 물감 자국이 아닌, 작가의 행위 그 자체의 흔적입니다. 점들은 하나의 생명체처럼 생성되고 소멸하며, 그 과정은 존재의 흔적과 사라짐의 여운을 남깁니다. 점 하나하나는 그 자체로 고요한 사색을 불러일으키며, 그 사라짐마저도 완전한 존재의 일부로 받아들여집니다.
<선으로부터>
<선으로부터> 시리즈에서는 점에서 선으로의 확장을 통해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점이 선이 되는 순간,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캔버스 안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힘찬 붓질로 생성된 선은 작가의 붓질이란 행위를 선명히 가시화하지만, 점차 그 힘을 잃고 희미하게 사라져 갑니다. 이 과정은 단순한 붓의 흔적을 넘어, 작가의 반복적인 신체 행위가 담긴 시간의 흔적입니다.
각 선은 동일한 방식으로 그려졌지만, 힘의 세기와 물감의 양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기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우리는 각기 다른 선을 보며 천천히 찍어 내려가며 탄생했을 선의 시작과 끝 즉, 시간성에 대해 떠올리게 됩니다. 선은 시간의 흐름을 담은 움직임의 기록이 됩니다.
<조응>
이우환의 대표적인 시리즈 두 가지를 보며 작품을 이루는 요소들과 작가, 그리고 관객인 나의 상호작용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조응> 시리즈로 넘어오게 되면 공간과 여백의 역할이 더욱 강조됩니다. 붓 자국은 물질성 그 자체를 드러내며 마치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질감을 지녔지만, 이 작품의 핵심은 물질의 흔적보다는 그 흔적이 남지 않은 여백에 있습니다.
가까이서 감상할 때는 붓 자국에 주목하게 된다면, 작품과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우리는 붓 자국과 캔버스의 여백이 만들어낸 새로운 관계를 인식하게 됩니다. 또한 작품이 위치한 공간을 한눈에 담을 수 있을 만큼 멀리 떨어져 감상했을 때는 캔버스가 전시 공간의 벽면과 거의 동화되어 연장된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키고, 그에 반해 붓 자국은 그 위에 응축된 존재로 다가옵니다.
단 한 번의 붓을 찍는 작가의 최소한의 개입을 통해 우리는 작품을 이루는 요소, 작가와 관객인 나, 그리고 전시 공간 사이의 관계에 대해 사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우환의 작품에는 단순함 속에 감춰진 깊은 철학적 사유가 담겨 있습니다. 한 번의 붓질, 한 점의 흔적, 그리고 여백은 단순히 시각적 흔적을 넘어 관계와 시간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이끌어냅니다. 그의 작품은 관람객에게 사유를 강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안에서 관람객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여백을 제시합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우리는 단순한 형상 이상의 것을 느끼게 되며, 그 미묘한 긴장감 속에서 고요한 울림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우환의 예술이 지닌 가치는 바로 이처럼 단순한 형태 속에서 무한한 의미를 피워내는 힘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