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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변의 잡설 Jun 26. 2023

나는 진보적인가

2013년에 썼던 글.

그때에 비해 난 어떻게 달라졌고

얼마나 달라졌을까.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용산참사, ‘용산 4구역 재개발의 보상대책에 반발해 온 철거민과 전국철거민연합회 회원 등 30여 명이 적정 보상비를 요구하며 2009년 1월 19일 새벽 용산구 한강로 2가에 위치한 남일당 건물을 점거하고 경찰과 대치하던 중 화재가 발생해 6명이 사망하고 24명이 부상당한 대참사’로 기록된 사건.

2009년 1월 19일 새벽, 그 순간은 내게도 뚜렷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비록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공간, 불붙은 화염병이 오가고 불붙은 건물 속 그들을 텔레비젼으로 지켜보면서, 나 역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급박함이 종료된 후 들어간 온라인의 각종 게시판들의 글들은 또다른 충격이었다. “돈에 환장한 치들”, “좌빨의 고소한 최후”. 추운 겨울 길바닥에서 사람이 타죽었는데, 이런 반응들은, 그리고 심지어 아예 무관심한 이들은 대체 뭐지...

더욱 낯선 것은 그 순간 나 자신의 모습이었다. 분노의 역치가 상당히 달라졌는지, 이런 순간에 대해서도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채 귀를 팔랑거리고 있는 나는, 대체 뭔가 싶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목도한 현실 속 부조리에 수없이 분노했고, 철나히 감정적으로 대응했다. 내가 쓴 글은 매우 직관적이었고 감정적이었다. 이번에도 충분히 분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극적인 순간에도 상반된 목소리가 나온다면 그 각각의 목소리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계적으로 중립적이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작정 감정에 호소하는 글은 그저, 즉자적인 분노를 공유하는 이들끼리의 집단적 자위에 그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하니 아찔했다. 과연 철거민들에게 자신을 덧씌워, '폭력성'을 외치는 이들에 대해 도덕적 우위를 점하려드는 것이 옳은 일일까.
 
그게 아니라면, 반대로 분노가 극에 달한 이들에게 정부와 같이 '법치'와 '보상기준'을 외치며 소위 '이성적 태도'를 독점하려드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과연 진실은, 진리는 무엇일까. 직접 오감을 동원해 그들의 진실을 느끼는 방법과, 적절히 취합된 fact 를 통한 방법, 과연 어떤 게 '완전한 인식'에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일까? 칸트가 말한 ‘물 자체’ 따위는 무시하고, 최대한 실천적인 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합리적 중도 우파'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은 직,간접적으로 철거민들의 입장에 대해 인식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을 것이고, 굳이 그들이 이 문제에 심도있게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분명 우리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결국 이들과 소통하지 않으면 제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번처럼 결국 누군가 죽어야만, 끝장을 봐야만 가능할지도. '법과 질서', '법과 원칙'을 맹신하는 이들은 일단 배제하더라도, 비교적 합리적인 이들과의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는 그런 생각들...

그동안 가끔 했지만 본질적인 문제의식의 영역에는 들여놓지 않던 생각들이었다. 그때 썼던 일기장들을 들여다보니, 아마도 나는 그때부터 기존에 해왔던 고민과 생각들을 모조리 의심하게 된 것 같다. 어느 하나 확신이 가는 것이 없었다. 감히 천박하다고 치부해왔던 주장들도 하나하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살펴보면, 합리적인 논거들이 많아보였다. 그리하여, 나는 과격하지 않은, 합리적인, 그러나 현장으로부터의 문제의식의 끈은 놓지 않는, 그런 모습에 최대한 탐닉하게 되었다. 외형적으로는 (일본을 잘 알지 못하지만) 일본인들이 어떤 주장을 함에 있어 '....이기는 하지만, .....라고 생각한다.'라고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매우 조심스럽게 말하는 모습이 왠지 좋아보이고, 또 닮고 싶었다.
 
이런 생각에 결정타가 되어준 것은, 인권오름의 어떤 기사 http://sarangbang.or.kr/bbs/view.php?board=hrweekly&id=1185
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이런저런 갈등들이었다. 자원활동가로서 써야했던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인터뷰 기사, 당장 나 자신도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에 뚜렷한 확신이 없었다. 결국 나와 같은 독자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하여, 특정한 입장을 기사에 반영하여 작성하기 보다는, 인터뷰 대상자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전후하여 겪었던 고민의 흐름을 기사를 통해 여과없이 보여주는 것이 독자들에게 보다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기사에 대해 단체 내에서 빗발치듯 비판이 쏟아졌다. “인권의식이 부족하다”는 비판 속에서, 나는 진보에 대하여, 그리고 의식이 뚜렷한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간의 연대가 가능한 것인지에 대하여 의문이 들었다.

그동안의 나는 일정한 윤리를 연역적으로 구체화하여 현실정치에 적극적으로 적용해야만 현실이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결국 중요한 것은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윤리’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내가 매우 이상적이었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분명한 실패였다.

결국 보편적인 이상법칙을 현실에 적용하여 일률적으로 개혁해나간다는 생각을 바꿔, 그동안 고민해왔던 윤리는 개인윤리 차원의 것으로 접어두고, 개개의 개별적인 제도들을 점차적으로 바꿔나가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세상은 혁명도, 캠페인을 통한 의식개혁도 아닌, 제도개혁으로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전문성을 갖고 구체적 이슈 중심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가득했고, 거대담론에 대해서는 반발심이 생겼다. 거시적인 관점을 새로이 정립하는 작업이 필요했지만, 최근의 고민들은 상당히 반동적인 성격을 갖는다.

1) 병영생활행동강령과 학생인권조례
육군 내 사병들을 대상으로 하는 ‘병영생활행동강령’은 '분대장을 제외한 병 상호간 지시 명령 간섭 등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 이를 엄격하게 적용하면 분대장이 아닌 상병과 이등병은 동등한 지위가 된다. 그러나 이를 준수하는 부대는 극히 드물 것이다. 한국군은 정전 이후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채 반세기를 넘게 보냈고, ’실전과 같은 훈련‘과 거리가 먼 군대는 병 상호간의 엄격한 군기잡기를 통해 유지되어 왔다.

그런데 2011년 해병대의 한 부대에서 총기난사사건이 발생했고, 이를 계기로 국방부는 전군에 내무부조리 색출을 지시했다. 내가 있던 부대에서도 ‘심층면담’, ‘소원수리’ 등의 형식을 통해 많은 부조리가 적발되어, 많은 병사들이 영창처분, 부대전출 등의 조치를 당했다. 당시 병장이었던 나는 부대가 변화하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병 상호간 일체의 간섭이 이뤄질 수 없었고, 이등병은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며 군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부정적인 사례가 빈발했다. 일단 하극상이 수차례 발생했다. 불만은 엉뚱한 곳에서도 터져나왔다. 하사 이상 군대의 간부들이 ‘군대가 개판’이라는 식의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종래 병사간 군기잡기를 통해 유지되었던 체계가 무너지면서, 그 책임이 그대로 간부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이다.

한국군은 그동안 사병 집단간 상명하복 질서를 통한 군기잡기가 횡행했고, 간부집단이 이러한 불법상태를 묵인하며 유지되어 왔다. 국방부의 조치가 이를 합법상태로 되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문제는 체제의 부조리를 척결할 뿐 아니라, 그 체제의 안정성 마저 일거에 무너뜨렸다는 데 있다. 격투기 선수 출신 이등병이 비쩍 마른 상병의 지시를 곧이곧대로 들을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내무생활에서의 엄격한 군기가 있었다. 국방부가 이를 척결하고자 했다면, 군기를 잡기 위한 대체수단을 고민했어야 했다.

마침 동 시기에 진행된 학생인권조례 역시 이와 닮았다. 당시 학생인권조례를 옹호하는 측의 논거를 살펴보면 학생인권조례 시행으로 인해, 학생 집단 간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스스로의 질서를 만들어갈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실제 시행 후 물론 물리적 체벌이 획기적으로 감소했다는 것은 주목해야 하는 성과이지만, 학생인권조례 시행 후 교실의 기득권이 교사에서 학생으로 넘어갔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로 인해 학생들이 자신들보다 물리적으로 우월하거나 역량이 뛰어난 교사에겐 복종하지만, 그렇지 않은 교사들에게는 반항하는 사례가 증가했다. 교실은 교사와 학생간 상하질서로 유지되며, 수업을 원하지 않는 학생들도 교사의 지시에는 순응해야 하는 공간이라는 점을 전제할 때, 기존의 교실에서는 무능력한 교사 조차도 학생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학생인권조례 시행 후의 교실에서는 교사가 기댈 수 있었던 일종의 ‘안전망’이 사라진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다.

위 경험은 머릿 속으로 의심하고 있었던 부분들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던 계기였고, ‘신좌파는 신자유주의에 복무한다’는 이종태 기자의 신좌파 비판에 공감하게 된 계기이기도 한다.
다만 나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을 객관적으로 치환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여전히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2) 성매매특별법
성매매특별법 역시 국가가 일종의 당위를 구축한 이후, 그로 인해 발생한 현상들에 대해서는 무책임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위의 사태와 유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강남 등지에서 버젓이 성업 중인 성산업에 대해 형식적인 단속에 그치는 것을 보면, 현실 자체만 놓고 보면 오히려 법 시행 전보다 상황이 악화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고, 과연 성매매특별법은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3) 2013년 이후의 생각들
2013년 1월 민주당의 총선 공천 과정부터 통합진보당 사태, 그리고 대선 패배까지의 과정들을 지켜보면서, 진보진영에 대한 회의감이 늘어갔다. 소위 지식인들의 반성은 종래에 진보진영 내에서 금기시 되었고, 진영논리에 의해 재단되었던 내용들이었을 뿐, 전혀 새롭지 않았다. 일종의 배신감마저 들었다. 그러나 나의 회의감 역시 무대책, 무기력에 지나지 않으며, 사실 그동안 관객의 입장에 서서 소극적이기만 했던 처지에 회의감을 품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개인윤리 차원 그 이상의 당위에 대해 고민하고, 이를 기초로 현상들을 판단해야 하겠지만, 솔직히 기술하자면 현재 어떠한 당위에 대해서도 확신이 들지 않는 상황이다. 희망버스나 쌍용차 건에 대해서도 의견을 유보하는 나 자신을 보면 보수화되고 있는 나 자신을 합리화하는 중인지, 아니면 정말 합리적인 고민을 하는 중인지 판단짓기가 어렵다.

며칠 전, 루시드폴의 ‘평범한 사람’을 들으며 집에 돌아오는 길,

오르고 또 올라가면
모두들 얘기하는 것처럼
정말 행복한 세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는 갈 곳이 없었네
그래서 오르고 또 올랐네
어둠을 죽이던 불빛
자꾸만 나를 오르게 했네

알다시피 나는 참 평범한 사람
조금만 더 살고 싶어 올라갔던 길
이제 나의 이름은 사라지지만
난 어차피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울고 있는 내 친구여
아직까지도 슬퍼하진 말아주게
어차피 우리는 사라진다
나는 너무나 평범한
평범하게 죽어간 사람
평범한 사람

내가 만약 변호사가 된다면, 갈 곳이 없어 올라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 자신의 이름이 사라지는 상황에서도 자신은 본래 평범한 사람이었을 뿐이라고 자위하는 사람들을 위한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고 다짐해보는 나는, 그러나 여전히 어떠한 현상들에 대해서도 확신을 갖지 못하는 나는, 나는 과연 진보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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