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변의 잡설 Dec 04. 2023

성범죄 사건에 대한 생각

성범죄는 둘만이 있는 은밀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피해자의 진술은 범행의 유력한 증거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또한 피해자가 일기장, 수첩, 달력 등에 기재한 내용, 피해자로부터 사고 직후 연락을 받은 제3자의 진술 또한 증거로서의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피해자의 진술뿐 아니라 달력, 제3자 진술 또한 사실상 피해자 진술로부터 파생된 증거에 불과하다. 결국, 피해자 진술이 거짓이라면 다른 증거들도 자연스럽게 거짓이 될 수밖에 없다.


비단 성범죄 사건뿐 아니라 오로지 당사자의 진술만 있는 재판을 준비하다 보면 진실이 무엇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기 어려울 때가 있다. 어느 한쪽의 진술이 맞는 것 같다가도, 다른 한쪽의 진술을 듣다 보면 이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도 의뢰인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고 일리가 있다 싶으면 그때부턴 스스로 논리를 세우고 의뢰인을 전적으로 믿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이게 사실이 아니라면? 


증인으로 출석한 피해자를 신문할 땐 피해자가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면서 이것저것 일관되지 않고 모순된 모습을 찾는데 골몰한다. 피해자 진술에 약간의 틈이라도 발견되면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지면서 재판부에게 피해자가 거짓말쟁이라는 걸 보여주고자 한다. 피해자는 정말 억울하고 분하다는 표정이다. 나를 쏘아보며 원망하는 눈빛도 수시로 보낸다. 아랑곳없이 피해자를 추궁하려고 하지만, 한편으로 찝찝한 느낌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피해자가 말 그대로 정말 억울한 피해를 입은 사람이 맞다면? 피고인이 내게 거짓말을 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피해자를 거짓말쟁이로 몰고, 심지어 눈물까지 보이게 만든 나는 얼마나 큰 업을 쌓은 것일까. 특히 성범죄의 경우에는..  만약 재판부가 내 변론을 설득력 있다 평가하여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한다고 해도, 사실은 피고인이 죄를 지은게 맞다면 나는 피해자에게 쌓은 업을 어떻게 씻을 수 있을까. 


무엇이 진실인지는 당사자들과 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범죄처럼 오로지 당사자의 진술만 남은 사건의 경우, 당사자에게 깊이 몰입하여 상대방을 악으로 모는 것은 몹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한 변론을 넘어 운동으로 승화하는 경우도 제법 많은데, 이런 경우는 어떻게 봐야 할까.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현재의 구조 하에서는 만약 피해자를 어떻게든 법정에서 성범죄 피해자로 공식적으로 승인받고자 한다면, 피해자를 훈련시키고, 사후적으로 달력과 노트에 피해사실을 기록해 내는 전략적 접근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가능할듯) 물론 성범죄의 특성상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기는 하다. 생각이 이어지다 보니 이런 ‘불순한’ 생각까지 하게 된다. 

작가의 이전글 사기 사건을 변호하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