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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디오키드 Sep 13. 2021

좀비보다 더 무서운 것

조지 로메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전쟁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긴다. 진영을 나누어 싸우던 이들도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화해보다는 소리 없는 전쟁을 이어나가는 경우도 있다. 세계 1차 대전과 2차 대전 그리고 이어지는 냉전과 베트남 전쟁은 미국과 사회주의 국가의 대립은 물론 미국 내에서 시민들을 갈라놓았다. 베트남 전쟁을 찬성하는 보수파와 반대하는 반전론자들의 대립, 가족과 세대 간의 대립 그리고 인종차별로 인한 대립은 미국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무수히 많은 전쟁을 겪고 과학의 발달을 누린 사람들에겐 고엽제를 아군 적군 상관없이 살포했던 것처럼 인간을 짐승의 목숨과도 비슷하게 보는 생명경시 풍조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매카시즘이 등장하면서 내부에 공산주의자 적이 있다는 것은 그대로 가족에게 적용되기도 했다.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이런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내부 분열되는 미국의 모습과 그 속에서 보이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제시한다. 좀비라는 괴물이 처음 등장했던 이 영화에서 좀비가 그 시대의 사람들과 닮아있는 모습들을 함께 알아보자.   


     

 

당연시된 생명경시


     

   

 오프닝 시퀀스에서 보이는 S자로 굽이굽이 꼬여있는 길을 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롱 샷으로 촬영했다. 인물들에게 닥칠 순탄치 못할 앞날을 예고하는 동시에 혼란한 미국 사회의 모습을 표현하는 듯 보인다. 아버지의 묘지를 찾아 추모하는 일마저 귀찮아진 조니에게 살아있는 시체인 좀비가 달려들어 그를 응징한다. 무수히 많은 전쟁을 겪었고 그 속에서 승리를 위해서는 아군에게도 고엽제를 뿌리는 미국 정부의 모습은 시민들에게도 영향을 끼쳤고 생명경시 풍조가 미국 사회에 만연하기 시작했다. 좀비는 전쟁과 대립으로 인해 죽었던 사람들의 사체처럼 느껴지는데 사회에 퍼진 생명경시 풍조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일깨우기 위해 감독이 좀비라는 매개체를 선택했을 것이다. 좀비가 끊임없이 산 사람들에게 다가가 공격을 가하는 것은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은 아닐까? 좀비가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전쟁으로 인해 부상당한 군인들의 모습이 투영된 것처럼 다가온다. 영화 중간에 클로즈업을 통해 등장하는 동물들의 머리 박제는 이런 시련을 겪은 사람들이 생명경시 풍조를 자연으로까지 퍼트리는 것은 보여주며 잔혹한 인간들의 모습을 대변하기도 한다. 특히 불타 죽은 인간의 시체를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게 “누가 여기서 요리를 했나 보군.”이라는 대사는 생명에 대한 존중을 상실해버린 사람들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공간을 통해 나타나는 수많은 대립


     

 

 전쟁과 냉전으로 두 진영의 대립뿐만 아니라 미국 내에서 일어나는 대립 구도를 공간의 대비를 통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크게 집 안과 밖으로 나눌 수 있다. 집 밖은 어둠이 내리깔렸고 알 수 없는 좀비들로 인해 안전하지 않지만, 집 안은 음식과 몸을 숨길 수 있으며 심지어 총도 있다. 어둠으로 가득한 밖과 달리 밝은 집 안은 안전하다는 신호처럼 느껴진다. 언젠가 무너질 벽을 사이로 밖은 서서히 좀비가 몰려들며 위협을 가하는 상황에 이르러서는 공포감이 극대화된다. 이러한 모습을 현실에 대입하면 전쟁과 냉전을 하는 국가 간의 대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이란 언제 일어날지 모르고 냉전 또한 언제 전쟁으로 바뀔지 모른다. 좀비로부터 목숨을 지키려는 집 안 인간들의 고군분투는 오히려 목표 달성도 못 할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목숨도 잃어버린다. 집 안의 공간을 나누자면 집 1층과 지하실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린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을 볼 수 있다.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신세대는 1층에서 좀비를 막으려 하지만 보수적이고 숨어야 한다는 구세대는 지하실로 내려가 숨어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낸다. 이런 세대 차이의 대립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는 결과를 낳게 되고 세대 간의 갈등은 점점 심해지게 된다. 또한, 넓은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베트남 전쟁으로 수많은 청년이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되어 돌아오자 미국 내에서 전쟁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반전론자들과 히피와 대립하는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보수 강경론자들과의 이념대립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내부 균열과 대립은 결국 집 밖과 집 안의 경계선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어 모두 죽음 앞에 놓인다. 마치 세대 간의 갈등에서는 어린아이에게 죽는 부모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반전론자와 강경론자들의 대립은 집 벽이 무너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인종차별을 바라보는 진보적인 시작과 현실적인 마무리


     

 

 여전히 인종차별이 진행 중이던 1960년대 영화에서 감독은 독특하게도 흑인을 주체적인 캐릭터로 사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주인공 벤과 달리 모든 등장인물과 좀비들은 백인이다. 좀비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나가기 위해 능수능란하고 사람들을 구하려 하는 흑인 캐릭터 벤과 달리 백인들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데다가 우유부단함까지 보인다. 권력의 상징인 총은 항상 흑인인 벤에게 들려있고 그는 모든 명령을 내리며 백인들을 지휘한다. “우리에 갇히지 않는다.”라며 당당하게 말하는 벤의 모습에서는 백인의 노예로 살아왔고 지금도 사회 인식은 변하지 않았지만, 흑인들이 극 중안에서는 백인과 동등함을 넘어선 우월한 존재처럼 다가온다. 백인이 주류가 되는 사회에서 흑인과 백인의 이미지를 역전시켜 표현하여 관객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한다. 하지만 모든 역경을 견뎌내고 구조대가 올 때까지 살아남은 벤은 좀비로 오인되어 머리에 총알이 박혀 죽는 최후를 맞이한다. 백인에게는 흑인이나 좀비나 별다를 것이 없었다는 사회적 분위기와 함께 흑인의 권리를 위해 앞장섰던 인권 운동가 말콤X와 마틴 루터킹의 사망 장면 모습이 오버랩 되며 여전히 바뀌지 않았던 현실에 대한 모습을 보여준다. 엔딩 크레딧에서 올라가는 여러 장의 사진들은 인종차별적 현실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라는 메시지를 보내려는 감독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좀비가 가지는 현대적인 특징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독특하게도 다른 괴물들과 다르게 보인다. 이는 좀비가 가지고 있는 현대성 때문이다. 좀비가 가지는 현대적인 특징 첫 번째는 바로 인간과 외형이 비슷해 정상성과 타자성의 구분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기괴하고 덩치가 큰 다른 괴수나 괴물들과 달리 좀비는 인간과 똑같은 외형을 가지고 있고 그 근본 역시 인간이다. 이제 인간이 죽으면 좀비가 되는 것은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의 대상이 더 이상 외부가 아닌 인간들의 주변인 내부로 침투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이 당시 영화가 만들어졌을 때 등장한 공산주의자들이 내부에 있다는 주장을 한 매카시의 매카시즘이 이에 해당한다. 적은 단일 대상이 아닌 우리 주위에 있다는 것을 주장한 것처럼 좀비도 비슷한 특성을 보이고 있다. 두 번째는 가족에 대한 공포이다. 산업 혁명 이후 핵가족이 확산되고 가족 내에서 많은 문제가 생겨났지만, 여전히 가족은 따뜻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보편적인 가치가 만연해 있었다. 하지만 쿠퍼 부부가 자신의 딸인 캐런에게 잔인하게 살해되는 장면은 가족에 대한 인식을 바꿔준다. 이젠 가족이 더 이상 안전한 보금자리가 아닌 공포의 대상으로 바뀌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마지막은 집단성과 전염성이다. 드라큘라나 프랑켄슈타인처럼 괴수나 괴물이라고 하면 단일 대상인 경우가 다수였지만 좀비는 그들과 다르다. 좀비는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인간들을 공격하는 특성을 지니는데 심지어 물리면 전염까지 되어 좀비로 변한다. 교통과 인터넷 보급 그리고 통신의 발달로 이전보다 작아진 세계에서 보이는 집단성이 투영된 것이다. 집단에서 소외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무조건적으로 유행을 따라가는 인간의 모습은 마치 좀비의 집단성과 전염성과 유사하다. 이러한 현대적인 문제점들이 좀비라는 괴물을 투영해 보여주어 사회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상기시켜준다.  


     

 

 이처럼 겉으로 보기엔 그냥 괴물이 나오는 호러 영화처럼 보이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그 당시 미국의 시대상을 녹여냈다. 전쟁과 냉전으로 이후 미국 사회에 만연한 생명경시 풍조와 함께 사라질 낌새를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문제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세대 간의 갈등이나 사회문제들을 좀비라는 매개체를 통해 은유적이면서도 직설적으로 감독은 자신의 의도를 관객들에게 말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살려고 했던 인간들은 그로 인해 죽어 나가는 아이러니도 담고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처럼 오늘날에는 또 다른 모습을 한 문제들이 나오고 사람들을 갈라놓고 있다. 좀비처럼 서로를 잔인하게 물어뜯으며 해결하기보다는 이성적으로 인간답게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며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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