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는 소위 ‘고문관’이다. 사고뭉치이고 루저다. 서른네 살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학창 시절에도, 직장 생활을 하는 지금도 달라진 게 없다. 뭐라도 하나 제대로 한 적이 없다. 뭔가를 하면 항상 문제를 일으켰다. 언제나 뒤처리가 걱정되는 존재였다. 그래서 늘 열외였다. 차라리 그게 편했다. 선생님도, 친구들도, 심지어는 그의 부모조차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인생에서 제대로 한 일이라고는 사지 멀쩡하게 태어난 것과 기적적으로 취업에 성공한 것 정도다. 출생은 그의 부모덕이라 해도 ‘덜 떨어진’ 그가 어떻게 일자리를 얻었는지는 지금도 불가사의에 가깝다. 한참 경기가 활황이던 4년 전쯤 갑자기 회사 물류 쪽에서 결원이 생겼다고 한다. 당시 인사담당자 표현으로는, ‘어쩔 수 없이’'손이 부족해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그를 채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저런 사람을 뽑을 수 있느냐’는 핀잔이라도 나오면 당시 인사 담당자는 되레 언성을 높이곤 한다. “모르는 소리 마라. 우리도 오죽하면 그랬겠느냐”고.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사실을 확인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K는 집안도, 학벌도 심지어는 외모까지 뭐 하나 내세울 게 없다. 거기다 일까지 그 모양이니 대놓고 무시당하기 일쑤다. 그의 편엔 아무도 없다. 그의 부모, 형제들까지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그걸 당연시 여기는 듯하다. 한 번도 불만을 제기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냥 그렇게 살아왔고, 그런 게 인생이려니 생각하는 듯했다. 더 나은 대우를 기대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게 투명인간처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인생으로 살아왔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려니 했다. 적어도 그날 전까지는 말이다.
K는 확실히 그날 이후 딴사람이 됐다. 몰라볼 정도로 바뀌었다. 사람들도 저게 그 ‘쭉정이 K’ 맞냐고 물어볼 정도다. 여직원들도 휘둥그레진 얼굴로 지나가는 그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도대체 뭐가 얼마나 달라졌길래 이 난리일까? 놀라지 마시라. K는 아침 출근길에 ‘무려’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웃기까지 한다. 투명인간처럼 들어왔다가 언제 나가는지 모르게 나가던 사람이, 꺼부정하고 부스스한 머리에 어두운 낯빛으로 고개를 처박고 다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달라져 먼저 인사를 하며 출근했던 것이다. 그뿐 아니다. 회의 시간엔 “그거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라고 손을 들기도 하고, 점심시간이 되면 밥 먹으러 가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식사시간엔 적절한 주제로 대화를 이끌어가고, 식사 후엔 커피를 쏘기도 한다. 사람이 그렇게 달라지자 웅성거림이 없을 수 없다. “저 사람이 어제 그 사람이 맞느냐” “몰라보겠네” “도대체 무슨 조화 속 이래” “저렇게 어깨 펴고 웃으니 인물이 꽤 괜찮은데”
말이야 바른말이지, K가 본래 떨어지는 인물은 아니었다. 워낙 일하는 게 시원찮고 제대로 하는 게 없어서 그렇지 생긴 것만 보면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날렵한 턱 선에 그럭저럭 곧은 콧날, 짙은 눈썹의 얼굴은 어렴풋이 깍지 않은 원석의 느낌을 풍기는 데가 있었다. 어깨를 펴고, 머리도 정리하고, 고개만 쳐들고 다닌다면 휠 나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게다가 키도 큰 편이다. 한때 부유하게 살았다는 소문이 영판 사실무근만은 아닐 거라는 평판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물론 누가 확인한 적은 없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누가 K같이 능력 없고, 센스 없고, 주변머리 없는 인물에 대해 관심이나 가졌겠나. 그는 그렇게 볼품없는 루저, 애인하나 없는 불쌍한 청춘으로 찌그러져 사는 게 당연해 보였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어깨를 똑바로 세우고 환한 웃음을 날리며 출근하는 풍경을 상상해 보라. 회사 곳곳을 누비며 활력을 뿌리는 그런 존재가 돼서 말이다. 그것도 하루아침에. 예고 없이. 그게 조물주의 조화라면 그간의 무관심과 직무유기를 통렬하게 자아 반성해야 마땅할 일이고, K 자신의 힘이라면 그 인간 승리의 감동 드라마는 응당 영화로 만들어져 최소 아카데미 각본상은 받을 만할 것이다. 그렇다. 그날 아침 그를 본 동료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워매 저게 뉘기여” “저게 그 찐따 K 맞다냐”
그날 이후 회사는 온통 K 얘기로 도배될 지경이다. 여직원들은 쉬는 시간만 되면 K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품평으로 거품을 물기 시작했고, 남자 동료들은 ‘거봐라 그놈이 처음부터 뭔가 좀 이상한 데가 있었어’라며 자못 날카로운 자신의 눈썰미를 자랑했다. 상사들도 과거 K의 숨은 가능성을 평가했던 자신의 발언,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발언을 힘들여 소환하느라 애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K는 순식간에 사내 인싸로 자리 잡았고, 그에 대한 추측반, 목격반 얘기들은 훌륭한 저녁 술자리 안주거리가 됐다. 또 하나. 그를 눈여겨보는 그룹이 있었으니. 바로 결혼을 앞둔 선남선녀들이다. 남자들은 갑자기 등장한 경쟁자에, 여자들은 현재 연애전선의 판을 흔드는 강력한 존재의 등장에 모두 긴장했다. 과한 관심은 필연적으로 시기나 질투로 이어지게 되는 법. 그와 경쟁관계에 놓일지도 모른다고 우려하는 비슷한 또래 직장수컷들은 이내 그에 대한 의혹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인간이 저렇게 하루아침에 변한 데는 필시 무슨 야료가 있기 마련. 그들의 관심은 이제 K가 갑자기 돌변한 그날에 쏠리기 시작했다.
그렇다. 그날은 K에게 운명과도 같은 그런 날이 있었다. 그의 모든 것을 완전히 바꿔버린 그날. 그날은 회사의 창립 20주년이었고, 서울 근교 유원지에서 전 직원 MT가 있었던 날이다. 무던히도 땡볕 더위가 기승을 부렸고, 불쾌지수가 극에 달하던 날이었다. K는 그날 인생에서 최악의 실수를 연발했고, 동료들의 그에 대한 인내심은 분노와 짜증으로 바닥을 드러냈다. 과연 그런 날에 어떤 일이 있었길래 사람이 그렇게 바뀐 것일까. 수많은 억측과 낭설이 횡행하고 있지만, 각설하고 이 쯤해서 K의 얘기를 육성으로 직접 들어보자. 다음은 그가 부서 사람들의 성화에 못 이겨 회식 자리에서 소주 4병을 까고 불었다는 당일 스토리다.
정말 그날은 이상한 날이었어요. 최악이었죠. 아침부터 하나도 제대로 되는 게 없는, 그런 ㅈ같은 날 있잖아요. 그날이 딱 그랬어요. ㅅㅂ. MT에 가야는 데 아침에 늦잠을 잤고, 버스는 중간에 사고가 났고, 저 때문에, 네네. 다들 기억하시죠. 저 때문에 행사가 늦어져서, 제가 스피커를 늦게 가져가서, 다들 땡볕 아래서, 그 뜨거운 땡볕 아래서 절 기다리셨잖아요. 그때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정말 죽고 싶었어요. ㅅㅂ. 그리고 게임도 저만 들어가면 다 지고. 삼각 이어달리기, 장애물 통과, 단어 이어받기, 줄다리기까지. 저만 들어가면 다 졌어요. 다들 저를 빼자고 했잖아요. 김 부장님, 양 차장님 고개 돌리지 마시고. 그때 다 그러셨잖아요. 심지어는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인턴까지 절 대놓고 무시했잖아요.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뭐냐, 휴일 집에서 뭐 하느냐, 운동은 안 하냐 등등. 뭐 이젠 상관없지만요. 그땐 다 너무 밉고 싫고 그랬어요. 세상 살기 싫었죠. 그래서 혼자 소주 나발 불고 비틀거리다 발로 앰프를 쓰러뜨렸고, 아 그 지지직하는 엄청난 소음. 행사장이 난장판이 됐잖아요. 네네. 죄송합니다. 지금도 지송 합니다. 아무튼 그날은 최악이었어요. 네. 그렇지요. 제가 그때 뭐 최악 아닌 날이 있었나요. 하지만 그날이 특히 그랬어요. 살기 싫다는 생각까지 들었죠. 그래서 혼자 숙소로 소리 없이 숨어 들어갔던 거예요. 그런데 자고 일어났더니 이상하게 뭔가가 달라져 있더라고요. 정말 이상했어요. 세상이 달라 보였어요. 의욕이 충만했어요. 죽고 싶었는데 갑자기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 그런 날 있잖아요. 바닥을 보니 올라갈 길이 보인 걸까요. 제가 딱 그랬어요.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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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이리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