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돌아가셨다. 8월 15일. 잊으려야 잊기도 어려운 날짜다.
내 삶의 전반부 육년을 맡아 양육하셨던 조모(祖母)는 생에 마지막 삼년을 요양원에 누워 보냈다. 가족의 면회조차 엄격히 통제되는 시국에도 예외는 있다. 임종이 임박한 경우다.
할머니는 오랜만에 보는 장남을 앞에 두고 한마디도 뱉어내지 못했다. 그때쯤엔 이미 숨을 들이마시는 것조차 힘에 부칠 정도로 기력이 쇠해있었다. 산소 호흡기를 때낸 입술 사이로 거친 숨이 들락거렸다. 갓 태어난 아이처럼 잡티 하나 없이 선명했던 선홍빛 혓바닥이 떠오른다.
그날 당신은 끝내 가느다란 목소리 한번 들려주지 못했다.
임종 닷새전의 일이다.
망인(亡人)이 된 조모님을 구급차 뒷자리에 실어 안동병원까지 실어 나른 것은 나의 아버지, 당신의 장남이었다.
다섯 식구가 어두운 고속도로를 내달리는 사이 나는 하얀 천으로 곱게 쌓인, 싸늘히 식은 당신의 옆자리에 앉아 옛 기억들을 떠올렸다.
후 바람을 불면 먼지가 폴폴 날릴 만큼 오래된 기억 속엔, 물이 넘치던 짜장 라면과 동네 형들에게서 참새를 빼앗아 얇은 다리에 실을 묶어주던 일. 그리고 또 서울로 이사하며 차창 밖으로 당신과 할아버지와 내가 나고 자란 시골집을 향해 손 흔들던 여섯 살 모습이 남아있다.
본디 사람은 간사하고, 나 또한 사람인지라... 그 뒤로 한동안은 명절 시골집을 찾을 때면 가장 먼저 당신의 품으로 뛰어 들다가도, 교복을 입을 때 즈음부터는 시골의 눅눅한 이불을 덮을 걱정부터 앞서게 됐다.
기저귀를 빨아가며 키운 손자가 변해가는 모습을 본다는 건 어떤 기분일지 쉬이 짐작이 가질 않는다.
떠난 사람은 말이 없지만 남은 자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사흘장을 할지 오일장을 할지. 그렇다면 장례식장에 도착한 새벽을 하루 까먹은 것으로 셈할지, 고기와 육개장은 몇 인분을 주문해야하고, 부고문자는 누구의 이름으로 보내야 하는지, 또 문어는 상에 올릴지 말지...
명절에도 보기 힘든 친척들이 모여들었고, 상복을 입지 않은 눈물 많은 여인네들은 조심스레 ‘호상(好喪)’이란 말로 유족의 슬픔을 덜어냈다. 잔병치레 없이 천수(千手)를 누리다 간 것을 그리 부른다면, 틀린 말은 아니다.
장례식장 모니터엔 할머니의 성함 네 글자와 나이가 적혀있었다.
모두가 잠든 사이 나는 각지에서 살다가 한날 같은 장례식장으로 모여든 이들의 인생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누구는 미망인과 슬하 자식만 남기고 떠났소, 또 누구는 아들, 딸, 사위에, 자부(子婦), 손(孫)까지 모니터에 공백도 남기지 않았으니 다복하게 지내다 떠났구려.
화환에 적힌 글자를 보아하니 자식들이 그곳에 적(籍)을 두었나 보오.
모니터를 꽉 채운 이도, 화환이 즐비한 이도, 그 중 누구도 내 조모님보다 오래 살다간 이는 없으니 호상(好喪)이라면, 호상이 분명했다.
부친의 건강이 성치 않으니 상주(喪主)는 내 몫이 되었다.
아버님이 거뭇하고 야윈 얼굴로 빈소에 딸린 방에 누워계시는 동안 나는 조문객들을 맞이하고, 멀리서 온 이들의 손에 차비봉투를 쥐어 보냈다.
빈소는 크게 붐비지 않았다. 스물일곱 해 전, 할아버지 때와 달리 누구도 목이 찢어져라 곡소리를 내지 않았다. 상복 치마를 입은 이들은 그저 영정사진 아래서 저고리로 눈 밑을 찍어 눌렀다.
발인 전날, 앉은뱅이 상에 둘러앉아 고모님이 말씀하시기를, 다시 태어나도 할아버지와 결혼 할거냐는 물음에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셨다고 했다.
그 바람대로 조모님은 한줌 분골이 되어 할아버지의 곁에 자리했다. 반평생이 넘도록 가꾸어온 안동 평팔 사과나무 밭이었다. 볕이 잘 드는 봉분이었고, 바로 옆에는 몇 해 전에 생겨난 고속도로가 뻗어있었다. 무더웠지만 청명한 여름날이었다.
당신을 보내며 나는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소망했다. 올해 다시 이곳을 찾는 일이 없기를.
그런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신의 장남, 내 아버지가 그 옆자리에 눕기 넉 달 전의 일이다.
이번엔 아무도 호상이란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