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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B Nov 15. 2022

대안학교 입학 원서를 썼었습니다.

1학년 때 딸을 주기적으로 때렸던 아이와 다른 반이 된 걸 알았을 때, 안심했다. 적어도 매 번 반에서 마주치지 않아도 되니, 더 이상 딸을 때리는 일은 없을 거라 걱정을 접어 두었다. 2학년 초입을 지나 얼마 되지 않아 딸과 운동장에서 마주쳤던 그 아이는 딸을 보자 또, 딸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았다. 딸은 집에 돌아와 그 이야기를 꺼냈고, 딸아이의 담임선생님께 그간의 일을 상세히 말하고 더 이상 이일로 딸과 내가 마음이 상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곧장 전했다. 여러 차례 주의를 받았을 그 아이는 복도 또는 운동장에서 딸아이를 마주칠 때마다 종종 놀리거나, 거친 말을 내뱉기를 반복했을 테다. 점심 후, 운동장에서 만난 딸아이에게 모래를 집어던진 날, 딸은 미쳐 다 털어내지 못한 모래를 묻힌 채 집으로 왔다. 아이의 머릿속에 숨은 작은 모래알을 털어 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꼼꼼히 생각했다. 학교로 전화를 걸어 작년부터 궁금했던 그 아이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담임선생님은 대뜸 학폭을 열겠냐고 물어 왔다. '학폭'이라는 말에 잠시 주춤거렸다. '학폭'까지는 열고 싶지 않았다.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아이들을 가해자와 피해자로 분류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단지, 그 아이를 만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딸을 때리지 말라고.  


작년, 하교를 한 딸을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 사건을 문제시 삼지 않았던 이유는 문제의 발단을 딸에게서 찾았기 때문이었다. 평균이라는 범주에 들지 못한 딸아이의 어리숙함 때문이라는 생각이 지배해서 담임교사에게도 그 아이의 학부모에게도 나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저 내 아이가 모자란 탓이라 여겼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쓴 눈물을 삼켰다.


그 아이를 만나려면 학부모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학폭 담당교사의 이야기를 들었고, 나와 통화를 원한다는 아이 학부모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원치 않았지만 통화를 했다. 학교에서 잦은 사고를 치고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의 학부모가 겪어야 할 고충은 말로는 다 못할 테다. 자신의 고충을 얼굴도 모르는 내게 털어놓는 그 아이 엄마에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상식'이 통하지 않을 거 같아서, 어른의 싸움으로 번지는 거만큼이나 어리석은 일도 없기에 나는 잠자코 있었다. 매일같이 자신의 아이 때문에 고개를 수그려야 하는 엄마는 어느 때가 되면 그조차 하지 않게 된다. 잠자코 들어만 주고 있는 내게 그 엄만 달아오른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남편과 함께 학교로 찾아가 궁금했던 아이를 만났다. 나와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하고, 주변을 반복적으로 두리번거리고, 불안한 채 손을 만지는 그 아이의 얼굴을 보자 당장 데리고 나가 떡볶이나 사 먹이고 싶었다. 아이는 그저 아이다. 언. 제. 나. 문제는 양육자 또는 보호자 또는 학부모에게 있었다. 아이의 세계를 가만히 잘 들여다보면 결국 부모가 알게 모르게 쥐어준 것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부모는 아무나 될 수 있지만, 또 아무나 될 수 없는 게 부모이기도 하다.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아는 나는 자격미달이라 매 번 어렵고 세상 큰 과제이다. 그 아인 나와의 약속을 현재까지 잘 지키고 있다.


그 아이를 보며 그 엄마를 더 떠올린 나처럼, 내 아이를 보며 누군가 나를 더 떠올리기도 할 테다.




딸은 제 '속도'로 자라고 있다. 그 속도가 '평균'에 들지 못해 나와 딸은 애를 먹고 있다. 곱셈의 답을 적고 시계가 가리키는 숫자를 써야 하는 깨끗한 학습지를 들고 나는 자꾸만 멍해졌다. 교과목의 단원평가엔 빨간색 별이 가득하고, 받아쓰기는 여전히 한 줄을 쓰지 못하는 딸아이를 매일 보며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어서 찬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오른쪽과 왼쪽, 위아래와 앞과 뒤 개념들을 이해하고 문제 상황에서 개념을 적용해 추론과 인과 관계를 파악해야 하는 인지 자체에 어려움이 있는 딸아이는 일상생활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인다. '점수'는 중요하지 않다지만 결국 교사들은 학생들의 평가지를 들고 동그라미를 치고 점수화해서 가정으로 돌려보낸다. 나는 회색 재생지를 든 채 점점 난감해져 갔다. 아는 것이 조금씩 늘어갔지만 모르는 것들은 점점 거대해지고 명확해져 갔다. 다시 말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분명해졌다. 딸은, 자신의 엄지손톱 옆 살들을 뜯으며 그 불안을 견디고 있다.


남편과 상의 끝에 대안학교를 알아보고 마침 집 근처 편입생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입학 설명회를 다녀왔다. '자유와 생명'이라는 큰 교육철학과 이념을 중심으로 개개인을 존중하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는 대부분의 수업과정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학생들은 자신이 해야 할 공부를 스스로 선택하고 만들어 가며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꽤 긴 입학원서는 부모가 아이를 키웠던 방식을 비롯해 부모가 추구하는 교육의 방향과 철학을 묻고 가족이 추구하는 행복도 묻고 있었다. 이틀에 걸쳐 남편과 나는 최선을 다해 기록했다.  


 '동시 입학이 원칙입니다, 사유서를 보내 주시면 고려해 보겠습니다'


나는 쌍둥이 엄마다. 그 사실은 완전한 행복도 완전한 불행도 아닌 어중간한 마음으로 살게 할 때가 더 많았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 이라지만 둘 앞에 놓인 선택은 어느 것 하나 유쾌한 만족감을 주지 못했다. 한 아이를 위한 선택은 다른 아이가 원하는 선택이 아닌 일이 더 많았고, 나는 이런 선택이 늘 아팠다. 입학설명회에 함께 다녀온 아들은 여러 날을 고민하더니 자연과 더불어 뛰어노는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동시, 입학을 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게 전부였다. 스스로 결정을 내린 아이에게 부모의 권한을 내밀며 강압적으로 밀어붙일 수 없는 일이었고, 그럴 마음이 어쩐 일인지 생기지 않았다.       


000 자유학교는 교육공동체입니다. 아이만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이 온전히 입학하고 공동체로 들어와야 합니다. 아이를 위한 학교, 마을, 공동체를 꾸려가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 동시 입학이 중요한 원칙이고, 학교에서 지켜나가려는 큰 가치입니다.


솔직하게 적어 내린 사유서를 읽고 다음 날 회신해 온 메시지를 들고 나는 속상한 마음이 앞섰다. 면담 기회조차 주지 않은 속상함 때문에 통화를 했고, 어떤 사유서를 썼어야 되는 거냐며 추궁하고 추가 입학 시기까지 묻고는 전화를 끊었다.


하루가 흘렀다. 감정이 걷히니, 사실이 보였다. 초등학교 2학년이지만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고 존중해주고 싶었다. 아무리 아이라지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나이이지 않냐는 물음에 학교 측은 어물쩡거렸다. 거듭 강조했던 '공동체'는 본인의 의사완 무관하게 무조건 형제가 또는 자매가 반드시 함께 다녀야 완성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자유와 생명이라는 큰 슬로건은 결국 개개인의 선택을 존중하고 선택 안에서 자유롭고 내가 가진 생명을 발산하는 일이 아니냐고, 묻고 싶었다. ‘동시 입학이 원칙’이라는 무엇보다 중요한 사항을 입학설명회에서 또는 설명회 책자에 왜 언급하지 않았을까. 학교는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했다. 의문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교육의 결이 달랐으니 연이 닿지 않은 건 당연했다.


왜?라고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어떤 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말이 되냐고 나보다 더 화를 내줘서 고마울 따름이었다.


오늘도 이렇게 삐그덕거리며 무릎   꺾이고 초등학아들과 싸우며 엄마의 자리를 지킨다. 정말 힘겹다.  결핍과 모자람과 한계와 바닥과 인간성까지 한꺼번에 들통나게 하는 부모가 되는 , 모두들  지키고 계신가요? 저는 정말 힘에 겨워 겨워 겨워 꾸역꾸역 하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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