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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 Feb 27. 2024

사자와 호랑이, 그리고 나

우울증이 아니라고 해서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우리 집에는 호랑이 한 마리와 사자 한 마리가 살고 있다. (여기서 호랑이는 시어머니이고, 사자는 내 남편이다. 시어머니의 띠는 호랑이 띠고 남편은 별자리가 사자자리라 임의로 붙여본 별명이다)


얼마 전 호랑이와 사자 사이에 큰 싸움이 있었다. 둘 사이에 엄청난 고성이 오갔다. 너무 순식간에 푸다닥 벌어진 싸움이라 나는 너무 놀랐고, 말릴 틈도 없이 중간에서 금붕어처럼 눈만 껌뻑거릴 뿐이었다.




사자가 이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 이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호랑이 눈치를 보고 살았다. 시아버님은 웬만하면 호랑이와 다른 공간에 있으려고 했고, 이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같은 집에 있으면서도 호랑이를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심지어 이 집에 사는 강아지마저도 호랑이만 보면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시아버님의 인품이 아니었다면 이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진즉 두손두발 들고 이 집을 떠났을 것이라는 것이 사자의 가설이었다.    


그에 비해 나는 호랑이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고객 상담부서에서 오래 일한 덕분일까? 나에게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것이 무지 쉽다. 호랑이의 심기가 불편하면 '아, 미안합니다' 하면 되었다. 괜히 주눅 들어서 아무 말도 못 하거나 변명하면 호랑이는 오히려 더 화를 낸다. 호랑이는 그렇게 자기 세력을 과시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호랑이가 제대로 임자를 만난 것이다. 사자는 호랑이가 자기 세력을 과시하려고 하면 나처럼 비위를 맞추어 주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처럼 깨갱하고 도망가지도 않는다. 사자는 맹수답게 달려들어 같이 싸운다.


싸움이 일어난 그날, 호랑이는 비겁했다. 시비도 호랑이가 먼저 걸었고, 어느 순간 자신이 건 싸움에 타당함이 없자 막말을 하기 시작했다. 사자의 자존심을 짓밟으며 선을 넘는 발언을 했고, 모욕적인 말을 스스럼없이 했다. 호랑이는 사자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호랑이는 사자에게 큰 상처를 입혔지만 호랑이가 이긴 싸움은 아니었다. 모두가 호랑이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이제 이 집에서 웃지 않는 사람은 이제 호랑이뿐이다.




그날 밤, 남편은 밤을 꼴딱 새웠다. 심장이 존재하지 않는 줄 알았던 남편이지만(ESTJ...) 시어머니의 말은 남편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나 보다. 나이가 많이 드신 부모님이 더 늙기 전에 커리어고 뭐고 다 내려두고 캄보디아까지 왔는데. 부인이 캄보디아에서 우울증에 걸려서 방황하는 것을 알면서도 부모님을, 그리고 부모님이 계시는 캄보디아를 포기하지 못했는데. 그 결과다 이거였다.


그리고 남편은 처음으로 나에게 진지하게 '그냥 우리 호주로 돌아갈까'라는 말을 했다. 처음 씨엠립에서 하려던 일이 잘 안 되어도, 씨엠립에서 프놈펜 부모님 집으로 내려오게 된 신세가 되어도, 내가 캄보디아에서 우울증에 걸려서 허덕거려도 절대 하지 않았던 말이다.


우울증이 아니라고 해서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남편도 힘들다. 어쩌면 남편이 나보다 더 힘들지도 모른다. 나는 정신줄을 놔버렸지만 남편은 그 덕에 정신줄을 놔버린 내 몫까지 두배로 버티고 있지 않은가.

우울증이 생긴 이후 나는 주변에 있는 사람을 돌보기를 포기했고, 그중에는 남편도 포함이었다. 남편은 나를 응원해 주고 다독여주었지만 정작 남편을 다독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오히려 나보다 더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일 거다.


'응, 당장 여길 벗어나자. 우리가 뭐가 아쉬워서 여기서 이러고 있어.'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나는 그 말 대신 '아니야. 2024년까지는 자리 잡아보기로 했잖아. 우리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조금만 더 힘내보자.'라고 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해보기로 다짐했다. 나만 힘든 게 아니다. 조금만 더 힘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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