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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 Oct 13. 2023

6. 나만 아는 네가 있다

#콤플렉스를 공유하는 일

 동거를 하면 어쩔 수 없이 연애만 할 때는 숨길 수 있었던 것들을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상황이 생긴다. 나도 S와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연애만 했다면 굳이 밝혀지지 않았을 나의 모습들을 들키게 되었다. 예를 들면, 나의 쌩얼이라던지, 이 갈기 스킬이라던지. 


 반대로 상대의 몰랐던 점에 대해서 알게 되기도 한다. S는 코골이가 매우 심했는데, 나의 이갈이 소리는 그의 코골이에 비하면 애교 수준이었다. 그는 방귀도 본의 않게 일찍 텄다. S는 방귀를 뀌고 싶을 때면 화장실로 몰래 들어가서 '뿍' 뀌고는 했는데, 본인은 몰랐겠지만 그의 방귀 소리는 화장실 바깥에서도 들렸다. 훗날 내가 '자기 방귀 뀌는 거 맨날 다 들렸어'라고 고백했을 때 그는 적잖이 놀라했다. (아니, 그 소리가 정말 안 들렸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S에게 나의 가장 큰 콤플렉스를 터 놓는 것은 참 어려웠다. 그는 이미 내가 아빠와 거의 대화하지 않는 것을 눈치챈 참이었다. 나는 아주 어렵게 우리 아빠가 알코올 중독이라는 것을 밝혔다. 숨길 수 있다면 최대한 숨기고 싶었지만 같이 사는 이상 숨긴다고 해서 숨겨지는 사실도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아빠가 알코올 중독이라는 것이 정말 큰 짐이고 흠이라고 생각했다. 자의로던 타의로던 아빠가 알코올 중독이라는 것이 밝혀졌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색안경을 쓰고 나를 보기 시작했다. 많은 것에 '네가 그래서'가 붙여졌다. 네가 그래서 술을 잘 마시는구나. 네가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사는구나. 이런 반응에 익숙했던 나는 이 사실이 밝혀졌을 때 나에 대한 그의 마음이 변할까 봐 무서웠다.  

 그러나 S의 반응은 생각보다 무던했다. '아 그래? 그렇구나' 그게 끝이었다. 그는 가끔 무서울 정도로 개인과 가족을 철저히 분리시킨다. S가 유럽에서 나고 자란 것이 이럴 때는 참 이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상대의 가장 약한 점을 발견하기도 한다. 화장실 한편에 렌즈 세척액과 렌즈케이스가 항상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을 보고 S가 콘택트 렌즈를 낀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같이 산지 꽤 몇 달이 되어도 그가 안경을 쓰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지를 못했다. '아 안경을 따로 낄 만큼 눈이 안 좋은 건 아니구나'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우리는 침실에 들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그날따라 은은한 나이트 스탠드의 불빛에 비춘 그의 모습이 좋아 그를 향해 씨익 웃었다. 그런데 뭔가 싸했다. S는 나의 미소에 반응 짓지 않았다. 


 "뭐야, 왜 그래? 화났어?" 나는 살짝 겁먹어 물었다. "뭐야 뭐야. 나 뭐 잘못했어? 왜 사람을 그렇게 봐. 내가 너를 보고 웃었는데." 내가 꼬치꼬치 캐묻자 S가 결국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미안해, 나 사실 네가 웃고 있는지 몰랐어. 나 눈이 나쁘거든." 나는 놀라 말했다. "내가 이렇게나 가까이서 있는데, 내 얼굴이 잘 안 보인다는 거야?" 


 S가 털어놓은 바로는, 그는 네덜란드에서 태어나자마자 아프리카로 가서 살게 되었는데 그때 너무 어린 나이에 백신을 이것저것 맞아야 했고, 그중 말라리아 백신의 부작용으로 심각한 시력 저하가 온 것이었다. 그는 양쪽 시력 모두 아주 낮다. 안경이나 콘택트렌즈 없이는 핸드폰 화면을 바로 눈앞 1-2센티 앞에 두어야만 무언가를 읽을 수 있다. 특히 그의 오른쪽 눈은 심각하다. 왼쪽 눈을 가리면 오른쪽 눈만으로는 아무것도 분별할 수 없는 정도의 시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나는 사귄 지 거의 일 년 만에, 같이 산지 거의 5-6개월이 되었을 때야 S가 안경 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S의 안경 렌즈는 아주 두껍고 무겁다. 그는 두꺼운 안경을 쓴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을 싫어한다. 콤플렉스 같은 건 없을 줄 알았던 S도 남에게 절대 들키기 싫은 모습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연애를 할 때 서로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완벽해 보이고 싶어서 자신을 포장하기 바쁘다. 우리가 동거를 하지 않고 연애만 하는 사이였다면 아마 서로의 콤플렉스에 대해서 오랫동안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그동안 사귄 사람들 중에서는 우리 아빠가 알코올 중독이라는 사실을 아예 모르던 사람도 있었던 것처럼. 


 나는 동거를 통해 배웠다. 사랑을 하면 상대방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어 진다는 것을. 그것이 상대방에 대한 좋은 점이든, 때로는 나쁜 점이 든 간에. 그러다가 사랑하는 사람의 약한 점을 발견했을 때, 우연히 노출된 그의 귀여운 습관이나 버릇들을 찾았을 때, 그 사람에 대한 애정이 더욱 깊어진다는 것을. 


 이제는 서랍 속이 아닌 침대 맡에 가만히 놓인 S의 두꺼운 안경을 보면서 마음 한편이 '아릿'한 느낌이 드는 것은 분명 깊은 애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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