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떠나지?'
더블린을 떠나자는 결심은 쉬웠으나, 어디로 떠날지 결정하는 것은 오히려 더 어려웠다. 우리는 '한 배'를 탔으니 우리 둘 다 정착할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했다. 어디든 본인이 태어난 곳이 아닌 곳에 정착하는 일은 어렵지만 우리는 그중에서 가장 나은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옵션 넘버 1. S의 정도의 경력이면 워크퍼밋 비자를 받을 수 있는 국가가 몇몇 있었다. 예를 들어 호주나 캐나다. 비자를 받을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것이라는 게 문제였다. 나는 더 이상 아일랜드에서 의미 없는 비자 연장은 하고 싶지 않았다. 되도록이면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옵션 넘버 2. 다른 선택지는 유럽 내 이동이었다. S는 유럽 내 국가에서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하니, 이웃 국가인 영국도 생각해 보았다. (참고로, 당시는 브렉시트 이전이다) 그러나 영국으로 갈 거면 아일랜드에 있는 것과 뭐가 그리 다르겠냐는 생각에 선택지에서 금방 지웠다.
네덜란드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나는 그때 네덜란드어를 전혀 하지 못했지만(그리고 지금까지도 전혀 못하지만) 전 국민의 90% 이상이 영어를 쓸 줄 아니 내가 살기에도 그리 어렵진 않을 것 같았다. S의 경우에는 자기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그가 선호하는 선택지는 아니었다.
옵션 넘버 3. 아예 영어권을 생각하지 않고, 어디든 비자를 스폰서해 줄 수 있는 회사에 먼저 취직해 그 회사가 있는 나라에 정착하는 방법도 있었다. 실제로 그는 중국 상하이에 있는 중국 내 가장 큰 전자 통신 회사와 인터뷰를 보기도 했다. 홍콩, 싱가포르 쪽으로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같이' 정착할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영어권이 아닌 곳으로 가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아 선택지에서 지우기로 했다.
결국 우리는 모험을 하기로 했다. 일단 가보기로.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호주를 가기로.
우리가 주변 사람들에게 이주 계획을 밝히자 예상한 대로 격려보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더 컸다. '왜 갑자기 호주로?', '직장은 구한 거야?', '비자 때문에 그러는 거야?', '워킹 홀리데이로 간다고?' 등등.
그도 그럴게 당시 S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소프트웨어 회사 중 한 곳에서 일하고 있었고, 팀 리더의 자리까지 올랐던 참이었는데, 하던 일을 다 때려치우고 호주로, 그리고 그것도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가겠다고 하니 내가 그들이었어도 도무지 이해가 안 갔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달랐다. 이것은 분명한 모험이지만 무모한 모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일단 나는 이미 워킹 홀리데이 경험자였다. 아일랜드로 가기 전 한국에서 워킹 홀리데이를 준비하면서 호주를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예민한 성격이 아니기에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것은 나에게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커피가 유명한 호주니 '나 한 사람 일할 곳 없겠어?'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리고 S에 대한 나의 믿음이 있었다. 그간 내가 봐왔던 S는 매사에 꼼꼼하고 계획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걱정에 앞서거나, 의욕이 꺾일 때마다. 그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걱정 마 수리, I am already two steps ahead' 나는 이 말을 백 퍼센트 신뢰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우리가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호주를 가는 것에 대해 두려움보다는 기대감이 컸다. 워킹 홀리데이는 그냥 우리가 호주에 잘 정착할 수 있게 하는 그런 디딤돌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호주로의 이주를 준비하면서 우리의 동거 생활은 더욱더 성숙해졌다. 주변의 우려는 우리를 더 결속하게 했고, 우리는 최상의 팀워크를 보여주었다.
우리는 그 후 7년 이상 호주에 살았고, 호주에서 결혼도 했다. 이쯤이면 '우리는 호주에 잘 정착했다'라고 볼 수 있겠다. 지금은 호주를 떠나 캄보디아에서 다시 새로운 모험을 시작하고 있다. 호주에서 정착했을 때 겪은 어려움과는 차원이 다른 어려움이 많고, 두려운 것 투성이지만 우리의 성공적인 이주 경험을 발판 삼아 여기서도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