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Türkiye)는 ’형제의 나라‘이다. 형제가 된 이유는 6.25. 전쟁에 대규모의 튀르키예 군인들이 참전하면서부터였다. 반세기가 훌쩍 넘은 지금도 튀르키예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면 ’형제‘라고 반갑게 맞이해준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튀르키예에서의 인연은 잊을 수 없다.
사프란볼루 터미널에서 이스탄불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였다. 버스는 1시간 후에 온다고 했지만 믿지는 않았다. 2~3기간은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기에 마음을 비우고 있었다(칼같이 시간을 지키는 우리나라 교통체계는 대단한 것이다).
“okey 할까?”
아내의 말에 아내, 나, 여동생은 바닥에 okey를 펼쳐 놓았다.
okey는 튀르키예 전통 보드게임이다. 구성품은 루미큐브와 흡사하고 규칙은 마작과 비슷하다. 튀르키예 어디든지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 게임을 즐긴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바둑이나 장기같은 국민게임이다. 우리는 okey 게임에 한창이었다. 연속된 세 개의 숫자와 같은 세 개의 숫자를 언제 꺼낼지 고민하며 머리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는데 뒤통수가 뜨거웠다.
’공공장소에서 okey를 하면 안되는 건가?‘
걱정스런 마음에 뒤를 돌아봤다. 검은 가죽 재킷과 빵모자를 쓴 튀르키예 아저씨들이 우리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이곳에서 특별히 사고 친 건 없는데?‘
이목이 쏠리니 겁부터 난다. 다행히 잘못한 건 없었다. 그들은 우리가 하는 게임을 구경하고 있던 것이다. 동양인 세 명이 튀르키예 전통 놀이에 열중하고 있으니 신기했나 보다. 인사만 잘해도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환한 미소로 인사를 한 후 okey 타일에 몰두했다. 그들도 우리의 게임판에 집중한다. 탑골 공원에서 바둑판을 지켜보는 어르신들 같다. 내 차례가 왔다.
“어떤 걸 내야하지?”
다음 수를 찾지 못해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저씨가 넌지시 내 패를 손으로 가리킨다.
'오호! 이 수가 있었군.'
그에게 감사의 미소를 전했다. 머리는 반쯤 벗겨지고 벗겨진 만큼의 털은 턱 밑으로 옮겨간 듯한 그는 재야의 고수처럼 보였다. 이에 질세라 여동생과 아내 뒤에 있던 아저씨들도 훈수를 둔다. 이제 우리만의 게임이 아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세 패로 나뉘어 나, 아내, 여동생과 함께 게임을 하였다. 개인전이 단체적으로 변했다. 게임이 끝나고 그들이 묻는다.
'어느 나라에서 왔나요?'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얼굴이 환해진다. ’형제의 나라‘를 느끼는 순간이다. 지긋한 어르신이 뜨거운 '차이(Cay)'를 주셨다. 사과 향이 가득한 차이 한 잔과 함께 몸짓 발짓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도 그들도 영어를 잘하지 못하니 되려 마음이 편하다. 한 아저씨가 담배를 건넨다. 어찌나 독하던지 '캑캑'거렸다. 제 반응이 재미있는지 '껄껄' 대며 웃는다. 버스가 도착했다. 짧은 인연이 아쉬워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꺼냈다. 그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몇 장은 선물로 주었다. 그들 중 한 명이 제 어깨를 잡고 말한다.
“당신의 여행이 안전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신이 함께하기를...”
이스탄불 바자르에서 있었던 일이다. 바자르는 튀르키예의 전통 시장이다. 없는 것 빼곤 다 파는 곳이라 대규모를 자랑한다. 입구에서부터 바람에 실려 오는 진한 향신료들의 향기에 정신이 혼미진다.
‘향기에 취해 지갑을 쉽게 열게 하려는 상술인가?’
개미굴처럼 펼쳐진 골목 사이로 추상적인 문양이 그려진 실크, 노랑, 빨강, 초록빛을 내뿜는 유리잔과 달콤한 디저트들이 파는 상점들이 즐비했다. 상인들은 "니하오.", "곤니지와"를 외치며 우리를 불렀고 우리는 못 들은 척하며 나아갔다. 바가지를 씌울 것 같기 때문이다. 페네르바체 유니폼이 보이길래 매만졌다. 주인이 나오더니 무조건 사란다.
“왜 사야해?”
하고 물으니
“네가 이 옷을 만졌으니까!”
라는 답이 돌아왔다. 어이가 없었다.
‘내가 호구로 보이나?’
큰소리로 따지고 싶었지만, 분란만 일으킬 것 같아 자리를 피했다. 시작부터 기분이 언짢다. 출구를 찾아 나서는데 또 다른 이가 우리를 부른다. 여동생과 아내를 가리키더니
“Who is the first wife?(누가 첫째 부인이니?)”
라고 묻는다. 가족을 건들다니... 매서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튀르키예도 예전에는 일부다처제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는 아롱곳하지 않고 아내가 둘이니 부자여서 좋겠다고 말한다.
‘장난도 지나치잖아. xx야!.', '내가 만만해 보이냐!’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영어가 안되기에
"She is my sister. and she is my wife.”
라고 전형적인 한국식 영어 문법으로 답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튀르키예어로 욕이나 몇 개 알아 놓을걸...
“really?”
그들은 몰랐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오해일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내 마음은 너그롭지 않은 상태였다. 오해를 풀고 그들과의 연을 이을 수도 있었지만 마음이 지쳐버렸다.
과연 그의 사과는 진심이었을까?
어느 시골 작은 터미널이었습니다. 대합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주차장에 낡은 봉고차들이 오고 가는 방식이다. 버스 시간표도 딱히 없다. 버스가 들어오면 그게 출발 시간이다. 커다란 배낭을 앞뒤로 메고 뜨거운 태양에 땀은 옷을 넘어 배낭까지 젖었다.
‘빨리 버스를 타야하는데’
발을 동동구르고 있자니 누군가 다가온다.
“Where are you going?”
어디를 가냐고 묻습니다. 낯선 이의 손길에 거부감이 든다. 호객일수도 있고 사기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게 없잖아’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그에게 행선지를 말한다. 그는 몇 사람을 부르고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더니 30분 정도 있다가 오는 봉고차를 타면 된다고 알려준다. 그들은 사기꾼도 호객꾼도 아니었다. 단지 강가에 놓인 작은 오리인 양 이방인인 내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손을 잡으며 감사함을 전했다. 봉고차 맨 뒷자리에 앉았다. 창가에는 히잡을 쓴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있었고, 앞자리에는 어머니와 어린 딸, 아들이 앉아 있었다. 이 가족들은 예상치 못한 한국인들의 탑승에 당황한 기색이다. 차는는 어색한 공기를 안고 출발했다. 1~2시간 지나니 적막한 분위기가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아내가 사탕과 젤리를 꺼내 아이들에게 건넨다. 아이들은 껍질을 벗겨 입에 물고 맛있게 먹는다. 아이들의 어머니는 봉지를 꺼내 튀르키예의 전통과자를 준다. 한 입 베어 무니 고소함과 달콤함이 함께 전해져 온다. 영어를 하지 못하는 어머니 대신 큰 딸이 어머니의 말을 영어로 전해주었다. 우리는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South?, ‘North?”
라고 묻는다.
“South”
라고 답하니 '주몽'이라고 말한다. 주몽? 혹시 드라마 주몽? 칼질하는 시늉을 하며 "주몽?"이라고 물으니 "Okey! Okey!"하며 엄지를 치켜세웁니다. K-드라마 덕분에 금세 친해졌다. 영어, 튀르키예어, 한국어가 섞인 말들이 오고 가며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순간 대화가 멈출 때, 이 가족들은 먹거리를 건네준다. 과자, 젤리, 과일, 사탕 등 주전부리가 끊임없이 나온다. 먹거리를 전부 우리에게 줄 요량이다.
’호의를 거절하면 쓰나?‘
열심히 먹었다. 감사함을 전하는 건 맛있게 먹는 것이다. 지루할 뻔했던 버스는 새로운 인연으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도착지에 내려서는 서로의 이별이 아쉬워 하였다. 그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 가방을 뒤졌는데 아무것도 없없다.
’얻어먹기만 했네.‘
미안하고 속상했다. 다음 여행에는 우리나라 부채 같은 작은 기념품을 챙겨 다니기로 다짐한 순간이었다.
튀르키예에서의 추억을 되돌아보면 볼거리, 먹거리, 즐길 거리가 가득했다. 나는 그것보다 여행 중 만났던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사람이 남는 다는 말이 맞다.
’안 좋은 인연도 있잖아요?‘, ’그러다가 상처받을 수도 있어요.‘라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좋은 인연만 만나기를 바라는 건 여행자의 욕심이 아닌가? 힘든 인연도 돌이켜 보면 소중한 걸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
사람에 상처받지만 사람에게 위로받는 또한
우리네 삶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