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석 지음
- 김완석 지음
그래서 특히 원치 않는 불편한 생각이나 느낌, 감각, 기억 등을 없애거나 줄이려는 식으로 통제하지 말고 그냥 관찰하고 알아차려서 수용하도록 가르친다(이를 수용이라 한다.) 이렇게 자신을 괴롭히는 불편한 생각이나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방식으로 수용하게 하는 것은 DBT나 MBCT에서도 공통적으로 강조한다.
명상은 생각이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모든 생각은 언어로 이루어지며, 언어란 본래 좋고 나쁨이나 옳고 그림이 없는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다. 하지만 언어는 경험을 통해 정서를 야기하는 힘을 갖게 되었다. 예를 들어 '과감한' 행동이라는 말은 듣는 이에게 자신감과 유쾌함을 이야기하지만, '무모한' 행동이라는 말은 열등감과 자괴감을 이야기한다. 둘 모두 불확실한 상황에서 내린 의사결정 행동을 묘사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우리의 신체와 정신의 활동은 완전히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다. 내 몸, 내 마음이라고 하지만 사실 내 몸과 마음은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다. 호흡은 신체 활동 중에서 자동으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의도적으로 조절이 가능하기도 한 흥미로운 활동이다. 이에 상응하는 정신 활동이 바로 주의다. 호흡과 주의를 의도적으로 조절하는 훈련은 대부분의 수련 전통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명상은 결국 나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한 조절력을 확장하려는 훈련이라 할 수 있다.
명상은 심신의 자동적인 연쇄반응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이를 의도적인 반응 선택이 가능하도록 하는 훈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훈련에 가장 기본적으로 활용되는 심신 활동이 바로 주의와 호흡이다.
빌헬름 분트와 더불어 현대 심리학의 태두라 일컫는 윌리엄 제임스는 "주의가 그 순간의 실재(For the moment, what we attend to is reality)"라는 말로 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명상은 의도적인 주의 훈련이다. 명상은 평소 자동으로 작동되는 주의를 의도적인 조절의 영역으로 만들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의를 의도적으로 조절하는 능력은 커다란 능력이다. 큰 성취를 이룬 위대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능력이며, 통찰과 창의성의 원천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구체적 행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정서다. 정서는 그것 자체가 동기적 힘을 갖는다. 심리학자들은 정서를 정적 정서와 부적 정서 및 중립 정서로 구분한다.
통찰명상은 이와 다른 방식으로 마음을 조절한다. 통찰명상은 자동적인 지각 과정을 알아차릴 뿐, 그 과정을 조작하지 않음으로써 마음을 조절한다. 이는 매 순간의 내적 경험을 하나의 일시적인 현상이나 바라보는 객관적인 관찰자적 관점을 취함으로써 생각이나 정서에 휘둘리지 않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통찰명상은 특히 생각의 비실재성을 깨닫고 생각에 반응하지 않는 것을 강조한다.
자비명상은 자신과 타인, 다른 생명체에 대해 좋은 태도와 정서를 계발함으로써 만성적인 부정적인 생각과 느낌의 해로움을 막고 긍정적인 태도와 정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다른 명상법에 비해 가장 적극적인 긍정성 개발법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집중명상은 이렇게 한 가지 대상에 주의를 모아 유지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아무 생각도 나타나지 않는 평온한 의식 상태를 조성하고자 했다.
명상은 쉬자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명상이든 잘 쉬는 데에 도움이 된다. 잘 쉰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편안하다는 것인데, 이때의 생리적 특징을 '이완 반응'이라 한다. 이완 반응 상태에서는 긴장된 생활로 생긴 근육의 피로와 파괴된 생리적 항상성을 바로잡는 신체의 자기 치유 과정이 발생한다. 이완 반응은 주의를 한 곳에 집중하는 집중명상으로 쉽게 만들어 낼 수 있다. 명상이 만성질환에 좋은 이유가 바로 이완 반응 때문이다. 이완 반응을 유발하는 쉬운 집중명상법으로 호흡관찰, 수식관, 만트라 등이 있다.
다행히도 심신의 이완은 비교적 짧은 주의 집중만으로도 일으킬 수 있으며, 비록 명상을 하다가 졸거나 잠에 빠진다 해도 이는 이완반응이 잘 일어나고 있고, 그래서 심신이 잘 쉬고 있다는 증거여서 충분히 유익하게 활용할 수 있다. 실제 명상을 하면 몸과 마음이 개운해진다는 보고를 흔히 하는데, 이는 아마도 주의 집중에 의한 이완 효과일 것이다.
명상은 의도적인 주의 훈련이다. 집중명상을 할 때는 당연히 미리 집중의 대상을 정하는 것 외에 매우 중요한 태도가 있는데, 역설적이게도 충분히 이완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1) 명상 중의 경험에 대해 수동적인 태도를 갖는다. 2) 미리 몸의 근육들을 충분히 이완시킨다, 3) 명상의 즉각적인 효과를 과도하게 기대하지 않는다 등이다. 일상용어로 말하자면 명상은 '힘 빼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이해를 토대로 감정에 대한 우리의 관계 방식을 자각하면, 실제 삶에서 어떤 부정적 감정이나 괴로움은 '불편하지만 당연한 것'이고 이를 느끼느냐 것이 건강한 반면, 생각이나 편견, 고정관념이 만들어 낸 근거 없는 괴로움이 우리가 밝혀서 버려야 할 느낌임을 알 수 있다. 통찰명상은 이런 과정을 가능케 함으로써 특히 괴로움이나 불편함과 관계하는 방식을 새롭게 할 수 있고, 더욱 생생한 삶을 살 수 있게 만든다.
자비명상이 추구하는 본성은 여러 종교에서 강조하는 것과 같이 다른 사람이나 존재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과 이타심이다. 자비명상은 의식 경험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긍정적인 정서와 태도를 계발하려는 수련이다. 긍정 정소는 생각과 행동의 다양성을 넓혀 주고, 역경에 처했을 때에도 거기서 긍정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하며, 건강과 행복에 중요한 하나의 심리적 자원이다. 자비명상은 본래 타인이나 다른 존재를 향한 것이지만 자신을 대상으로 수련해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정서와 태도를 배양할 수도 있다.
자비명상의 특이한 점은 긍정적인 정서와 태도를 계발함으로써 부정적인 정서와 태도의 해로운 영향을 방지하려 한다는 것이다. 즉, 자애는 애착과 미움, 적개심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며, 연민은 비통함과 잔인함에서, 동락은 오만함과 질투심에서, 평등은 무관심과 차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편이 된다. 동시에 사무량심 계발은 타인과 다른 존재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이타심을 뜻하는 보리심을 계발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꼭 열 번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꼭 위의 문구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자애와 연민의 차이를 이해하고, 적절한 문구를 만들어서 하면 된다. 이렇게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자비명상을 이제 대상을 바꾸어 가까운 사람, 얼굴 정도만 아는 중립적인 사람, 잘 모르는 사람, 나아가 싫어하는 사람에까지 확장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존재에 대해 자비를 수련할 수 있다.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는 행위 중심의 삶은 필연적으로 불안과 우울, 단절과 소외, 심신의 불건강과 삶의 질 저하를 야기한다. 명상은 따뜻한 행복과 의미, 충만함, 연결과 소통을 가능케 하는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알아차리고 음미하는 존재 중심의 삶을 살 수 있게 해 전체적으로 삶의 균형을 회복하고 자기치유력을 높여준다. 명상을 시작하고 일상화하려면 적절한 마음가짐과 노력이 필요하다. 일상에서 언제든 몸의 감각과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훌륭한 명상법이다.
존재 양식의 삶이란 지금 현재의 상태를 조급하게 바꾸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잇는 그대로 수용하고 허용하는 생활양식이다. 삶의 매 순간의 경험을 분석하거나 평가하거나 비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경험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온전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사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물질, 권력, 1등처럼 한정된 자원이거나 만족, 행복, 인정, 우월함 같은 심리적 자원조차 타인과 비교해서 더 낫기를 원하는 상대적인 것들이다. 이런 욕구의 추구는 필연적으로 경쟁과 비교를 낳으며, 우리의 주의를 외부로 향하게 한다.
명상은 괴로움을 피하지 않는 것이며, 즐거움을 쫓아가지 않는 것이다.
명상은 깨달음이 아니라 훈련임을 인식해야 한다. 깨달음은 훈련의 성과 중 하나일 뿐 명상수련은 생각으로만 하는 가상훈련이 아니라 '몸'을 동원하는 훈련이다. 방법이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체력 훈련과 마찬가지로 들인 시간만큼 효과가 나는 직접적인 훈련이다. 체육관 1년 치를 끊어도 직접 가서 하지 않으면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처럼 평소 마음속에 명상을 항상 품고 다녀도 직접 명상하지 않으면 아무런 효과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