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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너지니 Apr 07. 2022

검사 결과 정상 소견입니다.

문제를 문제라 부르지 못하고



별 문제없으시네요. 도대체 알고 싶은 게 뭔데요?



검사 결과를 전하는 의사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나는 알러지의 원인을 찾기 위해 피부과를 찾았다. 재발한 지 5개월이 지났지만 차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습진이나 한포진으로 의심되는 증상이 마치 한여름 잡초처럼 되살아나고 있었다. 벌써 네댓 번의 사이클을 따라 증상이 반복된 즈음이었다. 결국 알러지를 유발하는 요인을 찾기 위해 혈액을 활용해 109개의 성분에 대한 급성 알러지 반응을 확인하는 MAST 검사(다중 알레르기 항원 검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결과는 문제없음이었다.


문제는 내 몸이 '문제 있음'을 외치고 있었다는 거다. 군데군데 붉게 올라온 두드러기와 건조하게 쩍쩍 갈라진 피부 때문에 장갑을 끼지 않고는 외출도 어려웠다. 눈꺼풀 위에 두껍게 앉은 붉은 염증은 시시때때로 간지러웠고 심한 날은 눈의 모양까지도 바꿔놓곤 했다. 어떻게 이 의사는 눈앞의 환자를 보면서 알고 싶은 게 뭐냐는 말이 나오는 걸까? 좀처럼 화낼 일 없는 일상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간신히 화를 참으며 질문을 이어갔다.


- 혹시, 원인을 알 수 있는 다른 검사가 있을까요?

- 이렇게 작은 병원에서는 그런 검사 못 받아요. 큰 병원 가보시던가요.


뒤이어 래퍼에 빙의한 의사가 대학 병원 시절 경험을 시작으로 수많은 말을 뱉어냈다. 절반 가량은 영어로 된 전문 용어였다. 순간 의대 강의실에 앉아있는 듯 혼미해졌다. 진심으로 내가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어쩌면 이 의사의 말대로 내게는 아무 문제가 없는 걸 지도 모른다. 스테로이드 연고와 알약 몇 번만 먹으면 씻은 듯 없어질 일인데 내가 과민반응하고 있는걸 수도 있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을 붙잡고 늘어지는 건 나의 집착일런지도.




그 의사의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빌어먹을 '작은 병원'은 유명한 체인이었고 유명세에 몰려든 환자로 가득했다. 예약한 사람들도 30-40분 대기는 기본이었다. 당연히 대부분의 환자들이 평균 5분을 채우지 못하고 진료실을 나왔다. 이 병원 의사들의 최대 과제는 최단 시간 안에 진단과 약 처방을 마친 뒤 환자들을 내보내는 것임에 분명했다.


그런 그에게 문제없음이라는 클리어한 결과를 받아 든 환자의 질문이 탐탁잖을 리가 없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몸으로 느껴지는 허탈감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 받을 도움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자 이상한 안도감이 찾아왔다. 이만한 일로 병원을 찾아서 다행이었다. 더 큰 병으로 찾은 병원에서 이런 의사를 만났다면 어땠을까. 무심한 태도에 더 큰 상처를 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정말 의사 말대로 나의 문제는 문제가 아닌지도 모른다. 결국 해답을 얻지 못한 채 진료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때, 대기실에 앉아있는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고 나보다 먼저 접수한 분이었다. 불편한 다리를 끌면서 걷던 분이라 더욱 기억에 남았었다. 예약을 하지 않으셨는지 내가 진료실에서 나온 뒤에도 한참을 기다리고 계셨다. 그러나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린 그분께 허락된 시간도 역시나 5분이었다. 할아버지는 의문을 해결하고 나왔을까? 서글픈 기분이 배가 됐다.


병원에서 나라는 사람은 그저 L로 시작하는 질병 분류 코드에 불과했다. 이쯤 되면 고질적인 시스템의 문제였다. 우리의 의료 체계는 환자를 사람으로 대할 수 없는 환경이었을 뿐이다. 나의 고통은 차트 위에 쓰인 몇 개의 단어로 압축된다. 1미터가 채 안 되는 공간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시스템의 장벽을 넘지 못했다. 내가 원했던 건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전문 지식이 아니었다. 내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같이 고민해줄 사람이었다. 그날 내게 벌어진 일은 누군가 나의 고통을 들여다보고 공감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의 좌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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