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이 글을 쓰는가.
몇 년간 머뭇거리고 고민해 왔던 아주 기나긴 시간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이 글을 써본다. 주제는 이러하다. 나는 왜 도대체 20대에 내가 경험한 일을 글로 풀어내지 못해 안달 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즉, 이 책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토록 수많은 책이 범람하는 세상에 나의 글 하나를 더해야 한다는 욕망으로 찾아오는 것인지, 이 영감의 원천은 어찌하여 사사건건 내 삶에 나타나 나를 괴롭게 하는지에 대해 끝장을 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모든 일에는 명확한 와이(why)가 존재하지 않으면 끝까지 해낼 동력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니 나도 키보드를 켜고 도대체 왜 내가 이 영감을 받들어 책이라는 형태로 글을 써내야 하는지를 스스로 설득해보고자 한다. 사실 이 작업을 안 해본 게 아니다. 베스트셀러 편집자님과 완벽한 글의 컨셉과 목차까지 잡아보지 않았던가, 수많은 책 쓰기 강의와 책들을 통해 방법을 찾아보지 않았던가.
그러나 나 자신은 이미 알고 있다. 예상되는 책의 독자를 찾고, 그들에게 이 책이 얼마나 유용할 것이며, 시대의 트렌드에 맞춰 테마를 잡아본들 그 어느 것도 진실하지 않음을. 호랑이를 잡겠다고 다짐해야 여우라도 잡게 된다는 걸 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책의 결괏값이 세상에 얼마나 이롭게 작용할 것인가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다. 그것은 성적표에 가깝다. 나는 그저 이 책을 써나가는 그 과정 자체가 나를 어떻게 바꿔줄 것인지에 더 큰 관심이 쏠린다.
더군다나 세상에 내놓은 나의 작업이 단번에 슈퍼스타가 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은 대부분의 창작자가 가진 착각이다. 대다수의 책은 매대에서 사라지는 즉시 '놀랍게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가 되어 버리는 매정한 시대니까.
그래서 조금 더 똑똑하고 현실적인 친구들은 그 시간에 유튜브를 하거나 릴스로 자신을 알리는 게 먼저라 하였다. 그 방법을 나도 알고 시도해보지 아니한 게 아니다. 하지만 번번이 다시 책을 쓰고 싶다는 원초적 욕망으로 돌아오곤 한다. 책을 팔고 싶다거나 유명해지고 싶거나 오래도록 선망해 온 작가가 된다는 명예욕에 가까운 무언가는 부차적이다. 나는 그냥 쓰고 싶다. 그래 사실은 자기만족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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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족. 얼마나 기만적인 단어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따뜻하지 않다는 걸 우리 모두 알잖는가. 지만 좋자는 그 이기적인 동기를 사랑스럽게 봐줄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건 공동체를 지향하는 일도, 세상에 기여하는 일도,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는 일도 아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나만을 위해 그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어 보시겠다고?
응. 그래도 해보겠다고 내 영혼은 외쳐댄다. 그때마다 이성적인 나의 뇌가 작동하며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온들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의 혼란과 두려움이 몰려오기 불과 며칠 전 내게는 명료한 내면의 목소리가 들려왔었다. '이제 때가 됐다.' 그러니까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이제 내 삶의 시즌1을 마무리하고 시즌2 제작에 들어갈 때라는 명징한 느낌이 왔다.
내가 겪는 현실 속에서는 이미 시즌2의 삶이 예고편처럼 펼쳐지고 있다. 이런 식이다. 회사에서는 어느덧 짬이 가득 찬 대리급의 길을 걷고 있다. 과장 진급은 멀었으나 슬슬 매니저의 역할, 즉 누군가를 이끌며 일하는 방식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한 검증이 시작되고 있는 시점. 회사 밖에서는 오랫동안 축적해 온 지식들을 활용해 너 혼자만의 성장이 아닌 누군가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이냐고 질문하고 있다.
그러니까 사실 시즌2의 삶은 어른의 삶, 리더의 삶, 이끄는 삶, 헌신의 삶, 기버의 삶에 가깝다. 그런데 나는 이 부름에 응답할 준비가 되었는가. 클리어하게 YES를 외칠 수 없는 건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나만을 위한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시즌1의 이야기들이다. 나의 도전과 실패들, 나의 옛 영광들, 세상을 탐험하며 내가 모았던 꿰지 못한 구슬들이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다.
나도 알고 있다. 이 이야기들을 손에 꼭 움켜쥐고 있는 채로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걸.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추억의 상자들을 열어보고 싶었다. 지금 내가 처한 세상이 요구하는 바와는 정반대로 가는 일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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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상자에는 그리 예쁜 것들만 담겨있지는 않음을 미리 밝혀둔다. 청춘의 도전과 실패가 얼마나 나빠질 수 있겠냐 물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오랫동안 열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만큼 낮게 깔린 스산한 우울감이, 우매한 로맨스가, 자학적인 열정이, 끈적하게 들러붙은 자기혐오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어 이 안으로 들어가고픈 이유는 순전한 자기만족. 그리고 어쩌면, 지금 내가 갖게 된 빛으로 그 시기의 나를 어루만져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그마한 희망정도. 이 정도면 쓸 이유가 충분하다고 나를 다독여본다. 진득하게 자리에 앉아 시시때때로 떠오르는 영감들을 붙잡는 시간이 되기를. 오롯이 나를 위하여. 자기만족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