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윤범b Apr 12. 2024

2024041-2


기욤은 불빛 아래에 있었다. 불빛이 무슨 색이었는지는 떠오르지 않지만 그의 앞에 놓인 잔의 색은 파랗다. 잔은 투명한 것이었음에도 우울하다. 길고 높은 의자에 앉은 그의 모습을 보았다. 기욤이었다.

내 뒤를 쫓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도망왔다. 그때 내가 독립군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면 그도 나를 알아보았겠지만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 피부는 천조각에 가려져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가령 나는 가슴에 큰 흉터가 있음에도 그 상처를 알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어디가 아픈지, 그래서 무슨 약이라도 챙겨 다니는지 알 길 없는 것이었다. 

"난 처음부터 당신을 알아봤지."

그런 말은 대게 거짓말일 확률이 높은 것, 그게 진짜 말이 된다는 말인가. 내가 군인이었는지, 아니면 실패한 사진작가였는지는 그가 입을 떼어 말하기 전에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세상은 나를 몰랐다. 

길고도 긴 역사를 한 페이지로 정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듯 또 오랜 시간을 그 근처에 머물러야만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그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그에게 보낼 신호가 필요했으며 내 모습 행동은 그 시선을 끌만한 것이어야 했다. 먼저 다가가지 못하는 나는 그래서 사랑 앞에서는 몸을 사리는 비겁한 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내게는 용기가 없다. 

내게로 먼저 다가오는 그였다.

"무슨 일이죠?"

처음 그에게 한 말은, 그러나 쌀쌀맞기 그지없는 말투로 맞선 나였다. 처음부터 친구 또는 동지가 될 수는 없으리라. 인간은 어쩌면 방어로부터 시작해 공격하고 지배했는가 지배당했는가 자기 인생을 결론지으려 할지 모른다. 그와 나 역시 끝내 그런 이야기를 하고야 말지만.

그는 더 말하지 않을 듯 했지만 이내 표정을 바꾸어 입을 열었다. 어쩌면 그 역시 실패에 익숙했던 건지도.

"외로워서요."

그 음악 때문은 아니었는지. 가끔 그런 생각이 드는 건 그때 그 가게 주인이 그런 음악을 틀어놓지 않았다면 하는 것이다. 음악은 때로 후회 또는 미련을 남기도록 한다는 걸.

다음날 아침 우리는 한 방에 있었고 같은 침대에 누워 있다. 내 곁에 기욤이 잠든 채로 있었다.

"그래, 나는 영국 남자야."

우리가 잠이 들기 전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 그리고 내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였다. 새로운 해가 뜨면 지난 밤의 이야기는 모두 두 팔을 뒤로 감춰 숨기고픈 어린 아이의 장난질 같은 것이었음을. 뒤로 돌아갈 수 없다. 삭제할 수 없는 장면들은 늘 다시 새로운 시도를 하게 만든다. 그때는 꼭 명장면이기를.


여행자들이 모두 떠난 뒤 그 거리는 쓸쓸했다. 그런 모습으로 남아 더는 도시가 축제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살던, 또 기욤이 사는 도시 또한 우리는 늘 외로움을 감추려 했다는 것을.


https://youtu.be/HkgzObf8uVU?si=BmtRTKC2P-GjKjv1

작가의 이전글 투표할 권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