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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csa Sep 06. 2023

퇴직 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그건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것 같아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작년에 릴리즈 된 드라마가 넷플릭스에 올라와서 집중해서 시청했다. 제목부터 회사를 막 그만둔 나에게, 딱 맞을 것 같단 느낌이 들었는데, 내용, 배우, 스토리, 전개 모두 딱 맘에 들었다. 세상에서 멀어진 주인공이 시골마을에 찾아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스토리인데, 여기에 약간의 서스펜스를 첨가되어 이야기가 전개된다. 동백꽃 필 무렵의 약간 순한 맛 같은 드라마다. 


        주인공이 세상에서 멀어진 주요 계기가 퇴직이란 점이 나의 집중도를 높였는데, 퇴직하고 이틀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었다던 주인공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다. 퇴직을 하기까지 과정이 나의 경우와는 크게 달랐지만, 그동안 나를 짓누르던 무언가가 한순간 싹! 사라져 버리는 마법 같은 상황, 그런데 불안하고, 무기력해지는 그런 아이러니함이 드라마 초반에 잘 표현되었던 것 같다. 그래도 그렇지. 이틀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그런 주인공의 모습에 공감가기도 하고, 실제 난 그러지 못했음에 부럽기도 했다.





        요즘 나의 퇴직 후 일상을 돌아보면, 일주일이 지난 아직까지 거의 매일 저녁 송별회 명목의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다. 아침마다 숙취에 부대끼는 속을 움켜잡고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아빠 오늘 백수 7일 차! 즐겁게 보내! 아이의 짧은 인사를 듣고 아이의 등굣길 배웅을 위해 일어난다. 


        방학이 끝난 아이는 요즘의 나를 꽤나 부러워하는데,  아이가 카운팅 해주는 나의 백수 시간은, 아쉽게도, 다행스럽게도 13일 차에서 종료된다. 좀 더 길었으면 좋겠지만, 청구된 카드값을 정산하고, 대출 이자와 관리비를 내면서, 우리 가족이 하루하루 잘 살아가기 위해선 13일의 백수기간도 꽤나 사치스러운 일정이다. 나도 주인공처럼 퇴직을 계기로 어딘가의 바닥까지 내려가 그곳을 둘러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알코올을 통한 망각 혹은 기억 상실 정도에서 타협을 봐야 할 것 같다.





        술과 그동안의 인연에 빠져 살았지만, 그래도 하루에 한두 가지 그동안 못했던 일들, 앞으로를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을 차곡차곡 진행하고 있다. 컴퓨터 작업이 많아지면서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노안의 상태를 점검하고 안경을 맞췄다. 아빠와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신 선산의 성묘도 했고, 새로운 회사에서 걸맞은 비즈니스케쥬얼 의류도, 기숙사 생활을 위해 필요한 물품도 준비했다. 


        아이와 자전거를 타고 국밥 투어를 계속하고, 아내와 점심을 먹고 근처 카페를 손 꼭 붙잡고 다니고 있다. 이제 헤어숍에 들려 머리를 단정히 하고, 장거리 운전이 늘어서 차량 점검을 받을 예정이다. 짧은 가족여행도 다녀올 생각이다. 드라마 주인공처럼 긴 여행을 떠나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낭만적인 스토리였으면 좋겠지만, 아직 나에겐 퇴직도, 이직도 실전에 가까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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