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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Apr 28. 2023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마태복음서, 길 위에서 길을 가르치는 예수 (10-2)

함께 읽고 걷는 더 드라마, 예수의 길 떠난 가족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며,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시며,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루심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십시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십시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마태복음서 6:9-13)


photo by noneunshinboo 


1.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주의 기도’의 내용은 또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 . .” 


보기에 따라서는, 그리고 내가 당장 먹을 것이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리 절실한 기도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 . .’ 이 기도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정말 이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될까요? 그냥 남들이 하는 기도, 정말 끼니가 걱정인 사람들만 해야 할 그런 기도일까요? 


그렇다면 이 기도를 조금 다르게 해야 할까요? 비록 주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그때와 지금의 상황이 많이 달라졌고, 그때 거기와 지금 여기의 조건이나 처지도 많이 다르고, 그래서 각자의 처지와 상황과 조건에 맞게 주의 기도를 조금 바꿔야 할까요? 전부는 아니어도 몇 구절 정도는 각각의 교회와 공동체와 성도들의 처한 상황에 맞게 조금 바꿔도 될까요? 


솔직히 나에게는, 우리 공동체에게는 하루 하루의 끼니를 챙기는 것이 그리 큰 문제는 사실 아니고, 그렇다고 그냥 모른 척 ‘주의 기도’에서 이 대목은 건너 뛸 수는 없고. 그렇다면 각자의 마음 속에 있는 각자의 쇼핑 리스트 중에 떠오르는 것 하나를 그 자리에 슬며시 넣을까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 나에게 필요한 이러이러한 것을 주시고 . . .” 




아니면, 여기 ‘주의 기도’에서 말하는 일용할 양식, 혹은 필요한 양식은 그냥 일종의 상징이고 은유이고 메타포로 여길까요? 여기 말하는 일용할 양식 혹은 하루의 먹을 빵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우리가 필요한 그 모든 것들로 넓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이 어떻게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하면서 그런 물질적, 세속적인 것을 구할까, 그런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구하라는 말씀일 것이다,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하였다.” (마 4:4)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라는 기도다, 매일 우리가 가슴에 새기고 의지하고 영으로 먹고 살아갈 그 생명의 말씀을 구하는 기도다, ‘육의 양식’이 아니라 ‘영의 양식’을 구하는 기도다,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이신 예수를 열심히 찾아다닙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언제 여기에 오셨는지 묻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요 6:26)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의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은 이러하니, 누구든지 그것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요 6:48-51)


여기 말씀을 근거로,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빵 곧 그리스도 예수다. 그리고, 상징적으로 성찬례, 성만찬 때의 그 영성체를 말한다. 그렇게 성사론적, 성례전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phobo by noneunshinboo 


2.        


그럼 이 말씀은 어떻게 해석할까요?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시기 바로 직전입니다. 


“저녁때가 되니,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그러니 무리를 헤쳐 보내어, 제각기 먹을 것을 사먹게,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러갈 필요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마 14:15-16)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십니다. 지금 너희가 보고 있는 저 배고픈 사람들이 필요한 양식, 그 먹을 빵을 너희가 주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 . .”


‘주의 기도’는 하늘의 천사들이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그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 우리가 살기를 소망하며, 우리가 여기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살아가는 ‘삶의 기도’입니다. 여기의 현실을 떠난 기도가 아니고, 이 땅의 고단한 삶을 떠난 기도가 아니고, 추상적, 피상적인 기도가 아니고, 그리고 전례로 멈출 기도가 아닙니다. 영적 의미만 찾아내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주의 기도’는 현실에 눈을 꼭 감은 채 입으로 외워 습관처럼, 버릇처럼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눈을 똑바로 뜬 채, 손과 발과 몸으로 하는 기도이고, 구체적으로 하는 기도, 그리고 실천적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 뿌리를 박은 채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현실 기도’입니다.  


당장 내일 먹을 것이 없는 나의 현실 속에서만 하는 기도도 아니고, 이젠 조금 넉넉해져서 굳이 오늘 그리고 내일 먹을 빵을 위한 기도가 필요하지 않은 나의 현실이면 그만 두는 기도 역시 아닙니다. 나의 지금 처한 상황과 처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의 기도’는 내가 더 이상 배를 곯지 않아 감사하고, 넉넉하진 않지만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어 감사하고,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백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배고픈 사람들은 내 주변에 있고 많고, 그런 그들에 대한 나의 미안함을 담은 기도이고, 그래서 그 끼니를 걱정하는 그 가난한 이들을 내가 잊지 않고 꼬박꼬박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고, 그래서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 하나님께 간청하는 기도입니다. 


photo by noenunshinboo 


‘나’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가 아닌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하는 ‘주의 기도’는 ‘나’와 ‘너’, 그리고 ‘좁은 우리’를 넘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지금 보고 계시는 여기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이들, 그 ‘넓은 우리’ 모두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용할 양식, 오늘과 내일 먹을 빵을 넘어서 하는 기도입니다. 


“주님, 저들에게 하루하루의 그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주님의 자비와 은혜와 용서, 그리고 주님을 아는 지식과 주님의 복음 또한 주소서. 그리고 온 땅이 배고픔과 아픔에서, 악과 죄와 어둠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온 땅 위에서 이루어지고,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오고, 아버지의 이름이 온 땅에 가득하게 하소서.”


그래서 ‘주의 기도’는 온 세상을 위한, 그리고 이 땅에 사는 모든 우리의 이웃을 위한 ‘중보 기도’입니다. 몸이, 마음이, 그리고 그 영이 배고픈 우리의 모든 이웃과 세상을 위한 모든 신앙인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동체 기도’입니다. 


(→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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