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 서면수집
도토리 서면수집_독후감
양귀자, 『모순』을 읽고
# 각 챕터마다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멋진 구절들이 가득해서, 내 책은 밑줄로 가득 채워졌다. 안진진이 처했던 상황이, 차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내 처지와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일까. 작가님의 바람처럼, 나는 이 책을 천천히 읽으며 안진진에게 몰입했고, 내 감정을 온전히 쏟아붓고 있었다.
# 오늘같이 비가 쏟아지고 꿉꿉한 날이면, 괜히 마음속에도 눅눅함이 스며드는 것 같다. 인생에서 혼자 현실을 견디기 힘들던 시기에, 여행 중 뜻밖에 만난 폭우 속에서 꾹꾹 눌러 담았던 서러움을 E와 M에게 터뜨렸던 밤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M이 조용히 말했다.
"치프람 주변에는 행복한 사람들만 있나 봐. 조금 덜 행복한 사람이 있었다면 위로가 되었을 텐데."
그 말을 들으며 나는 타인의 불행을 통해 내가 안도하려는 건 비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다고 기분이 나아질 리도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상처는 상처로밖에 위로할 수 없다."는 구절이 깊은 여운을 남겼고, 그제야 M의 말의 진짜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안진진의 서사를 통해 나 역시 오래 묻어두었던 경험과 감정을 떠올랐고, 그 감정의 소모만큼 안진진의 생각과 선택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 동질감은 어떤 위로의 말보다 더 큰 위로가 되었다.
# 첫눈 따위 오거나 말거나 아무래도 좋았던 안진진의 엄마. 첫눈이 오지 않아 풀 죽어 있다가도 결국 첫눈을 맞으며 행복해하는 이모. 내 어머니보다 이모를 더 사랑하는 이유가 이모의 낭만성에 있다는 안진진. 그런 안진진의 마음에 나는 너무도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일출을 백 번 보든 천 번 보든, 내 삶에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근데 먹고사는 데 아무 상관이 없을지라도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감동할 때 내가 인간이라는 걸 알게 돼요."
예능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님이 피렌체에서 일출을 감상하며 했던 말이다. 이 말은 내가 추구하는 삶과 매우 비슷하다. 나에게 중요한 건 '일상 속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삶'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다양한 친구들과 함께 여러 곳을 여행했다. 게국지가 먹고 싶으면 태안, 별을 보고 싶으면 대관령, 경비행기를 타고 싶으면 담양 등등. 그 모든 여행은 각자의 이유가 있었고, 각자의 감정이 있었다. "그 경험들은 서울에서도 다 할 수 있는데?"라는 몇몇 친구의 말에, 나는 "그 자리에 가서만 느낄 수 있는 분위기, 감정이 바로 여행의 묘미야!"라고 소리치고 싶어진다.
# 엄마는 이모의 굴곡 없는 삶을 부러워하며 가끔 질투 섞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감수성을 느낄 틈도 없이 치열한 삶을 살아온 엄마를 오히려 부러워하던 이모는, 그 감정을 드러내지 못했던 만큼 그 부러움은 더 깊었을 것이다. 어쩌면 '무덤 속 같은 평온' 속에서 살아가는 이모는, 힘겹더라도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엄마의 생명력과 생기 넘치는 삶이 부러웠던 건 아닐까?
# 안진진이 결국 결혼 상대로 이장우가 아닌 나영규를 선택한 장면에서는 처음엔 놀랍고 약간의 아쉬움도 느꼈다. 그러나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고 나서는 충분히 납득이 갔다. '현실적인 안정'인 나영규를 택한 안진진의 선택에 이모는 "무덤 속 같은 평온"이라며 반대할지 모르지만, 나는 25년간은 주어진 삶을 살아온 그녀가, 남은 삶에서는 본인의 의지로 새로운 삶을 선택하여 살아가길 원한다. (이는 안진진에 대한 응원과 바람이자 나에 대한 바람이기도 하다.) 어떤 선택을 하든, 선택하지 않은 쪽에 대한 아쉬움은 항상 남기 마련이고, 어떤 선택이든 늘 행복하거나 늘 불행하지 않다는 걸 아니까. 안진진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극단적인 선택 대신, 그녀만의 깊고 풍부한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묵묵히 살아갈 것이라 믿는다.
내가 닫은, 모순의 열린 결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