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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유정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내가 모은 도토리_토막글

by 치프람

# 2022년 6월 18일, 우리 인연의 시작

내 인생의 첫 독서모임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이 있다. 이들을 나는 ‘치프람의 피톤치드 제2군단(혹은 멘탈케어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이, 성별, 직업 등 모든 면에서 너무나 다른 우리가 우연히 이렇게 좋은 인연이 된 건 정말 감사할 일이다. 독서모임은 매달 한 번씩 정규 모임이 열리며, 때때로 친목도모를 위한 번개 모임도 열린다(참고로 번개는 강제는 아니다). 번개 모임을 진행할 때는 ‘번추위(번개추진위원회)’를 두 명 뽑는데, 모두 이를 피하려다 보니 종종 랜덤 이름표 뽑기로 진행되곤 했다.


N번째 번개 랜덤 추첨에서 G가 뽑혔다. 하필 그날따라 날씨가 너무 좋았던 탓인지, 실내에서 영상을 보는 번개였는데, 직전 취소하신 분들이 많았다. 다들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것에 대해 이해한다. 하지만 이벤트 관련 업무를 담당했던 경험상, 이런 상황은 정말 힘이 탁 풀리는 허탈한 기분을 알기에, 번추위 두 분의 응원 겸, 오늘 오는 의리파(?) 분들을 위해 도넛을 사갔다. 그런데 문제는 인원수를 착각하여(정말…허술하기 짝이 없구려…) 도넛을 하나 덜 샀다는 것. 그런데 결국 번추위 멤버인 나머지 한 분도 오지 못했다. 떼잉 이럴 줄 알았으면 도넛을 좀 천천히 먹었을 텐데! 결국 G는 혼자서 4명(치프람, 본인의 업무 분야 이외에도 폭넓은 지식을 가진 배려의 아이콘 N님,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항상 무한 공감해 주는 I님, 우리에게 항상 예술 정보를 제공해 주시는 동안 큰 형님 H님)을 이끌고 번추위를 시작했다.


영상은 예상보다 흥미로웠고, 우리는 묘한 전우애가 싹튼 터라, 그날 함께 식사도 하며 정산을 위해 카톡 단체방을 만들었다. 단톡방 이름은 바로 그 날인 “6월 18일”. 이 단톡창과 우리의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지도 있다. 사실 나는 낯도 많이 가리고 낯선 사람에게는 철벽이 디폴트라(덕분에 대학교 때 별명이 만리장성이었다),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이 인연이 이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때 나는 ‘N님, I님과 친해지고 싶어!’라는 말을 주변 친구들에게 말할 정도였고, 함께 의리파(?)에 들며 ‘친해지게 될 운명이었구나!’라는 생각에 더 마음이 끌린 것 같다.


# 코맹맹이 4인방

바쁜 일상을 보내며 지난겨울, 사전에 불참 연락을 준 H님을 제외하고, N님, I님, G님과 정말 오랜만에 만나기로 했다. 그때 감기에 걸려 몸이 좋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무리하더라도 만나고 싶은 마음에 집을 나섰다. 그런데 이게 웬걸! 만났는데 다들 코맹맹이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보다 더 심한 코맹맹이 소리를 내는 이들의 모습에 걱정이 되어 “아니 다들 무리하지 말고 그냥 다음에 만날걸 그랬어요.”라고 말했더니 “그치만 무리해서라도 만나고 싶었어요ㅠㅠ”라고 하나둘씩 답하는 멤버들. 그들의 마음이 나와 같다는 것에 감동했다.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편안한 사이. 어른이 되어 진심을 나눌 수 있는 인연은 만나기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참 좋다.

KakaoTalk_20250303_195544979.jpg 연말이라 인당 하나씩 받았던 눈사람 치즈


# 이런 유정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하얼빈 여행을 다녀온 바로 그 주 토요일, G님, N님, I님과 만났다. 이들을 위해 산 소박한 선물을 호기롭게 꺼내며 여행기를 본격적으로 들려주려고 드릉드릉하던 순간… 여기저기서 “사실은 저도…”하며 수줍게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내는 게 아닌가! G는 몇 달 전 이탈리아에서 사 온 책갈피를, I님은 “해외에는 가지 않았지만, 얼마 전 갔던 전시가 너무 좋아서 여러분들 생각이 나서 책갈피를 샀어요! 올해 책 더 많이 읽으시라고~”라고 말하며 책갈피를 꺼냈다. 마치 다람쥐들이 도토리를 하나하나 꺼내는 듯한 모습처럼 보여 너무 귀여웠지 뭐람. 이 와중에 본인은 준비 못했다며 미안해하는 N님. 정말, 이런 유정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KakaoTalk_20250303_125608728.jpg 우리의 마음 모아 모아

누님들(이라고 쓰고 치프람이라 읽는다)의 등쌀에 고통받으면서도 살뜰히 잘 챙겨주는 G님에게 정말 고맙다. 항상 사진 담당, 음식 셰어 담당인 그… (사실 나는 G님을 늘 ‘막내’ 혹은 이름 마지막 글자(경상도 특)로 부른다.) G님 없이 N님, I님, 나 이렇게 셋이 카페를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엉성하고 불편한 자세로 빵을 자르는 N님과 I님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우리 셋은 한바탕 크게 웃었다. 그리곤 N님이 “어머, 생각해 보니 전 우리끼리 있을 때는 디저트를 한 번도 잘라본 적 없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I님도 고개를 끄덕이며 “어 저도요! 그래서 익숙하지가 않나 봐요ㅎㅎ”라고 응답했다. 그 순간, 우리는 G님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달았다. G가 막내이긴 하지만 나도 막내라인이라, 나이프가 하나일 때는 G가, 두 개일 때는 나와 G사 함께 나서서 자르곤 했는데, 물론 나는 ‘먹기 좋게’만 자르고, 섬세한 G는 ‘깔끔하게’ 잘랐다.

G야, 앞으론 누나들이 디저트는 잘라줄게~ 그래도 사진은 네가 계속 찍어줘!


# 돈 받으세요

올 막내 G야, 제법 단호한걸.


이번 모임에서 내가 꺼낸 큰 주제 중 하나는 스터디였다. 나는 재작년에 회사 후배 두 명을 대상으로 외국어 스터디를 진행했는데, 한 명의 퇴사 후 중단했다. 이후 그 언어를 배우고 싶다는 다른 후배들의 요청에 힘입어, 기존 멤버 P를 포함해 총 4명을 대상으로 스터디를 재개했다. 그런데… 복습 퀴즈 10개 중 10개를 맞힌 사람이 2명, 3개 틀린 사람이 1명. 꽤 선방했다. 그런데 P 혼자 1개만 맞았다니… 이 눔이? 반타작도 아니고 1개라니, 이건 성의의 문제다. 이런 자세가 이어지면, 열심히 하고자 하는 분위기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다음 날 저녁을 먹으며 열심히 하는 분위기를 흐리지 말라고 했지만, 조금 더 부드럽게 말할 걸 후회했다. 우리 스터디의 기조는 ‘즐겁게 오래 함께 공부하기’인데, 내가 욕심을 부린 건 아닌지 고민도 했다. 사실 P는 숙제도 다 해오고 질문도 많이 해서 의지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P에게 노력한 것에 대해 몰라주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고 속상했던 마음을 털어놓았을 때, G가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 스터디는 수업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수업료는 받지 않지만, 디파짓+벌금 제도 운영하면서 제자들이 커피와 디저트를 사주고 있다고 대답했다. ‘회사 사람한테 어떻게 돈을 받겠어’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사실 나 또한 그들과 함께하는 스터디 시간이 즐거워서 괜찮다고 했다.

그런데 G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내 ‘노동의 대가’로 받으라기 보단, 멤버들이 더 진지하게 임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하려고 받으라는 것이었다. 수업이 무료라고 해서 수업을 준비하는 나의 시간과 노력이 무료는 아니니, 이를 더 존중받기 위해서는 고민을 해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오, 일리가 있다. 새 시즌을 진행할 때는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겠다.

KakaoTalk_20250303_214727846_01.jpg 스터디 제자 B의 반려묘. 심하게 귀엽다. (공부 중인 것을 어필하는 사진인 듯 하나...)

하지만 이번만큼은, 열심히 하려는 의지의 힘을 더 믿어보고 싶다. 실제로 P는 그다음 시험에서 더 많은 문제를 맞혔고, 자잘한 실수로 틀린 것에 대해 분해했다. 나머지 멤버들도 꾸준히 성실하게 스터디에 임하고 있다. 매주 100점 만점자도 나오고 있다. 이 기세라면 나는 계속해서 기쁜 마음으로 이 스터디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잘하는 것보다 열심히 하고, 노력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역시 교육 관련 일이 내 체질이 아닌가 싶다.


# 확신의 똥손이지만

나는 아주 작은 요행도 바라지 않을 만큼 운이 좋은 사람은 절대 아니다. 그래서 제비 뽑기에서 순서가 먼저 오는 것도 나에겐 의미가 없어서 항상 다른 사람들이 먼저 뽑고 남은 것을 가져가곤 했다. 일본 여행에서 신사나 절에 들를 때는 꼭 운세를 점치는 종이를 뽑는 ‘오미쿠지’를 하는데, 길(吉)이 나오면 가져가고, 흉(凶)이 나오면 나무에 나쁜 기운을 묶어놓고 온다. 같이 간 친구들은 흉은 잘 안 걸리던데, 나는 나무에 묶을 때가 종종 있다. 가위바위보조차 항상 지는 편이다. 하지만 내가 인복만큼은 타고난 게 틀림없다. 이렇게 멋진 인연들을 만날 수 있게 되어 또 한 번 감사한 하루다. 기회가 된다면 내 피톤치드 제1군단 E와 M의 이야기도 소개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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