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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학 May 28. 2023

도서관 2

방학식 전날,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에서 적과 흑의 결말부를 읽었다. 의외의 결말이었는데 주인공 쥘리앵은 본인의 과오를 인정하고 담담히 사형을 받아들인다. 중반부까지 승승장구하며 묘사된 야망 가득한 모습과 크게 대비되어 인상깊었다. 귀족 부인과 우여곡절 저지른 불륜이 어쨌든 진정한 사랑이었다고 애절하게 표현되며 이야기는 마무리가 되었다. 상권을 꺼내와 앞부분을 듬성듬성 다시 읽어봤다. 주인공의 불륜을 처음 밀고한 하녀 알리자라는 인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최근 줄곧 나를 불편하게 만든 도서관의 상황이 알리자의 상황과는 대비되어 괜히 마음이 쓰였다.


 알리자는 쥘리앵에게 고백을 했다가 거절당해 앙심을 품고 있다가 불륜이라는 그의 약점을 쥐게 되자 이를 밀고하여 쥘리앵을 잠시 곤경에 빠뜨리는데 나 또한 사서 선생님의 근무태만이라는 약점을 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리자는 쥘리앵의 약점을 아주 잘 활용했지만 나는 오히려 누군가의 약점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적어도 사서 선생님의 불합리한 조기 퇴근을 방해하여 곤경에 빠뜨렸다는 죄책감은 쓸 데 없는 것이었다. 약점을 알고 있음이 밝혀짐으로써 내가 좋아하는 도서관에 다시 못오게될까봐 두려웠다. 지나치게 내성적이고 필요 이상으로 이타적인, 나의 약점이었다.     


 선생님의 약점을 차라리 내가 아닌 지우가 알고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지우한테는 미안하지만 나는 지우를 선생님으로부터 오는 불편함을 막아주는 한겹의 방패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밀고자를 지우로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가정, 약점을 아는 사람은 내가 아닌 지우일 것이라는 거짓이 나의 그릇된 죄책감과 두려움을 덜어주는 셈이었다. 지우는 자신의 기분을 위해 부당함을 바로 표출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나보다는 더 알리자를 닮았다. 불친절한 선생님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약점을 대담하게 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난 주에 적과 흑 하권과 함께 무작위로 꺼내어 빌렸던, 가장 두꺼워 보였던 그 책은 분노의 포도였다. 원래는 적과 흑 다음에 이 책을 읽어야했겠지만 두껍고 진지한 고전은 잠시 쉬고 싶어 우선 반납하기로 했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세 권을 꺼내 대출대로 갔다. 대출한 책들을 가방에 넣을 때 사서 선생님이 말을 걸어왔다.


 “방학 때 도서관에서 봉사 활동 안할래? 새로 들어오는 책들도 있고 장비 작업도 해야되는데 희원이가 도와주면 좋을 것 같다. 책 좋아하니까 재밌게 할 수 있을거야. 봉사 시간도 받을 수 있어”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건 것은 처음이었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마침 방학동안 봉사 활동 시간을 채우기 위해 반 친구들과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 근무 태만 사건이 떠올랐다. 둘이 있는 동안 그 얘기를 꺼내면 어떡하지? 그렇게 방패를 꺼냈다.


 “네, 저는 좋아요! 근데 지우도 같이 해도 돼요?”


 그 때 지우는 책장 너머 열람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지우가 이 대화를 듣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지우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은 제안이었다.


 “신지우? 쟤? 너네 둘이 사귀니?”


 질문을 듣고 얼굴에 열이 살짝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재빨리 대답을 했다.


 “아니요! 혼자보다는 친구랑 같이 해야 더 재밌을 것 같아서요. 지우도 책 좋아하는 것 같고요”


 선생님은 탐탁치 않은 표정을 지었고 지우를 불러 상황을 설명했다. 나에게 얘기할 때보다는 말투가 조금은 퉁명스럽게 느껴졌다. 지우가 대답했다.


 “하고 싶은데 제가 좀 멀리 살아서요. 일주일에 몇 번해야 돼요? 몇시까지 와야돼요?”


 “주3일에 오전에만 도와주면 될 것 같은데 둘 다 하기로 결정한거면 내일 방학식 끝나고 같이 계획을 짜보자. 둘 다 학교 끝나고 할 일 없잖아?”
 
 선생님은 할 일이 없어서 매일 도서관을 찾아오는 우리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을 했고 지우는 엄마와 상의를 해보고 내일 알려준다고 얘기했다. 집이 멀어 태워다주는 일 때문인 듯 했다. 나는 바로 도서관을 나왔고 이내 지우도 따라 나왔다.
 
 “야 너 뭔데 나랑 같이 하자고 그러냐? 너 나 좋아해?”


 “아니, 선생님이랑 단 둘이 한다고 생각하니까 좀 뻘쭘할 것 같아서…”


 “선생님인데 단 둘이 있는 게 뭐가 뻘쭘하냐. 너 선생님 좋아하지?”
 
 돌아오는 질문들의 수준이 나를 짝사랑에 목마른 남자 아이로 보는 시선에 맞춰져 있었다. 길게 설명하기를 단념하고 싶었다.
 
 “아니, 아무도 안좋아하고 아무도 안 사귀어. 그냥 선생님이 불편해서 그래. 한 학기동안 얘기 나눈 적도 거의 없는데 갑자기 봉사 얘기를 꺼내시잖아. 좋은 기회니까 그냥 같이 하자? 응? 갑자기 너도 끌여들인 건 미안해.”
 
 “나는 그 선생님이 나 싫어하는 것 같아서 싫은데…안그러면 왜 너한테만 따로 물어봤겠니? 그래도 봉사 시간이 필요해서 하고싶다고 한거야. 엄마도 태워다주는 수고가 있겠지만 아마 허락해줄 것 같아. 방학 때 집에서만 빈둥빈둥 노는 걸 못마땅해할 게 뻔하거든. 도서관 핑계대고 안가는 날엔 집에서 편하게 쉬어야지”


지우는 내가 자기를 방패로 이용한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겠지. 계단을 내려오며 지우는 배가 고프다고 투덜댔다. 미안한 마음에 학교 앞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사준다고 제안해봤지만 어머니가 곧 데리러 올 시간이라 안된다고 대답했다. 교문에서 헤어질 때 지우가 나의 휴대전화 번호를 물어봤다. 번호를 불러주었고 나도 지우의 번호를 받아 저장했다. 그 날 저녁 지우한테 문자 메시지가 왔다.


‘엄마가 해도 된대. 내일 만나서 같이 가자. 끝나고 우리 반 앞으로 와’
 
 도서관 봉사는 매주 월수금, 주3회로 오전 아홉시부터 오후 열두시까지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총 기간은 2주였는데 선생님의 휴가 일주일을 전후로 하게되어 사실상 격주로 학교에 오게 되었다. 설명을 들으며 머릿 속으로 받을 수 있는 봉사 시간을 계산했다. 지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간단한 봉사 신청서를 작성하니 선생님은 우리에게 귀가해도 좋다고 말했다. 방학식날이니 우리를 오래 붙잡아두지 않으려는 선생님의 배려였다. 하지만 지우는 도서관에 남아 책을 읽는다했고 나는 집으로 향했다. 지우는 아무래도 책을 좋아하게 되었나보다.   


 주말을 쉬고 월요일 아침 아홉시에 맞춰 도서관에 왔다. 첫 주는 장서 점검 작업을 도우게 되었는데 낡아서 버릴 책들을 분류한 후 도서관에 남아 있는 책들을 전부 점검하는 일이었다. 백 권 가량의 책 제목과 저자가 적혀있는 리스트를 받았고 이 책들을 책장에서 찾아와 커다란 박스에 모아놔야 했다. 버릴 책들 중에는 나의 이차성징을 도왔고 앞으로 도울 예정이었던 것들도 많았다. 중학교 도서관에 있을만한 물건들은 아니라고 선생님도 인지를 하고 있었구나. 무관심이 주는 즐거움은 끝이 났구나. 나의 은밀한 아쉬움을 알 길 없는 지우는 흥미로운(외설적인) 제목의 책을 꺼내올 때마다 내 얼굴에 들이밀며 읽어봤는지 물어보곤 했다. 물론 읽은 책들도 있었지만 읽었다고 밝히진 못했다.


 누더기가 된 초판본 태백산맥 1부와 2부도 폐기 대상이었다. 나는 그 중 1부 2권을 맞은 편 책장에 몰래 숨겨놓았다. 나중에 따로 챙겨 집에 가져갈 속셈이었다. 분량이 많은 태백산맥을 나는 끝까지 읽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1부 2권은 흥미로운 장면의 묘사가 가장 많았다는 것은 기억이 났다. 사람들의 손을 많이 타서 표지와 흥미로운 페이지가 유난히 너덜너덜한 것이 그 증거였다. ‘어차피 버릴 책이니까 이건 재활용이야’ 속으로 변명을 했다.


 그렇게 한시간 반 가량 책을 찾고 날랐다. 막바지가 되자 지루하고 힘들어서 책을 농구하듯 박스 안으로 던져 넣었다.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책들도 있었다. 책장에 숨겨진 태백산맥 1부 2권도 그 중 하나여야만 했다. 못 찾은 열두 권을 제외하고는 전부 찾아 모았다고 선생님에게 얘기했다. 선생님은 폐기 도서 리스트와 박스 안의 책들을 한 권 한 권 대조하며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 동안 우리는 열람실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그러던 중 선생님이 우리를 불렀다.


  “흠 이상한데…다른 건 모르겠는데 태백산맥 1부 2권만 없는 건 이상해. 태백산맥은 권 수가 많아서 고민하다가 상태가 심각한 1,2부만 버릴 목록에 넣었거든. 새 책을 주문하기 전에 내가 전 권이 있는 것을 확인했었어. 1부 2권은 유난히 상태가 별로였여서 기억이 나”


 심장이 철렁했다. 임기응변을 펼쳤다.


 “아, 제가 아까 그거 통째로 옮기기 전에 책장 앞에서 잠깐 펼쳐 읽었었는데 빼놓고 안가져왔나봐요. 가서 찾아올게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책장으로 달려가 책을 가져왔다. 가방에 미리 넣어놓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책도둑 뿐만 아니라 이차 성징에 목마른 색골마인으로 몰릴 뻔했다. 그나저나 선생님, 꽤 예리하구나. 얕은 수 쓰다가 걸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선생님의 확인이 끝나자 수위실에서 빌려온 수레에 책들을 담아 소각장으로 옮겼다.  소각장에 다녀오니 이번엔 도서관 청소를 시켰다. 나에겐 바닥을 쓸고 닦게, 지우에겐 책장과 창틀을 닦게 했다. 청소를 안한지 굉장히 오래됐는지 대걸레를 여러번 빨아와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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