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힘
내 시체를 이 쓰레기의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졸음이 입을 막아 입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 바람결에 화약 연기 냄새가 끼쳐왔다. 이길 수 없는 졸음 속에서, 어린 면의 젖냄새와 내 젊은 날 함경도 백두산 밑의 새벽안개 냄새와 죽은 여진의 몸 냄새가 떠올랐다. 멀리서 임금의 해소기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배는 격렬하게 흔들렸고, 마지막 고비를 넘기는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선창 너머로 싸움은 문득 고요해 보였다. 세상의 끝이.. 이처럼.. 가볍고 또.. 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 칼로 베어 지지 않는 적들을.. 이.. 세상.. 을 남겨..놓..고 내가 먼..저 관음포의 노을이.. 적들 쪽으..
김훈 작가님의 소설 <칼의 노래>의 마지막 장면이다. <칼의 노래>는 이순신 장군님을 역사 속 위인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공감할 수 있게끔 다리를 놓아준 책이었다. 책이 내 손에 들려 있는 시간만큼은 그가 든 칼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고 외로움을 업을 수 있었고 두려움으로 함께 숨을 쉴 수 있었다. 그가 짊어진 무게는 아침, 낮, 밤으로 달랐다. 피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아침잠에서 깨어나어 갑옷과 함께 책임감을 입었으며 촛불 하나에 의지하여 일기를 쓰면서 그리움과 걱정으로 긴 밤을 보냈다. 한 나라의 장군이면서 나와 같은 그저 한 사람으로서 일생을 살아가는 그의 속을 경험할 수 있었다. 나는 이와 같은 경험을 선사하는 책과 사랑에 빠졌다. 책이 끝나면 상실과 공허가 찾아오며 이별을 겪을 때와 같은 방황을 피할 수 없었으므로 참을성이 없는 나는 즉각 새로운 ‘사랑’을 찾아 손에 쥐려고 하며 그, 혹은 그녀가 부디 나를 그들의 세상으로 끌고 가주길 바람으로 책을 열었다.
배우가 되는 배우 훈련을 받기 전에는 작품을 하지 않는 기간을 무용하다 여겼다. 배우가 쉬는 날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던 나는 주로 교보문고에서 시간을 보냈다. 바닥이든 의자든 서서든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책을 읽었다. 돈이 없어서 책을 살 수 없었기 때문에 그날 읽은 페이지를 머리에 접어놓고 다음날 와서 다시 읽기를 반복했다. 그곳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회전문을 열고 들어가면 곧장 새로운 세계가 열리듯 바깥공기와 소리로부터 차단되는 그 느낌이 늘 새로웠다. 교보문고에는 특유의 향이 있었는데 언젠가 그 향이 디퓨저로 출시된 걸 보고 의도에 공감하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나 역시 그 향을 좋아했다. 사람의 체취에 따라 다른 향이 나는 것처럼 그건 고유의 향이었다. 다른 공간에 뿌리는 건 언니 옷을 입은 것 같은 어색함이 나서 허락되지 않는 책의 체취가 묻어나는 그 장소만의 정체성이었다. 그래서 구입하지 않았다.
나는 주로 에세이와 소설책이 있는 곳에 머물렀다. 젊음날의 패기를 풀지 못해 답답함으로 가득 차 있던 멈춰있던 시간이 고이지 않게 해 준 건 자기 계발이나 마인드셋이 아닌 ‘낭만’과 ‘상상’이었다. 마음이 힘들 때면 에세이를 읽었고 주로 소설을 읽고 가끔 여행책을 읽었다. 에세이를 읽는 동안에는 저자의 시선으로 주변을 보게 되는 게 신기했다. 마법의 묘약이 종이에 묻어있듯 읽는 행위를 넘어서는 게 자연스러웠다. 저자가 어른답고 차분하게 삶을 너머로 바라보면 나도 그러했고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저자에게서는 나에게도 발견이 일어났다. 히어로가 된 듯, 나 자신이 멋진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저자의 영혼을 입고 나면 자연스럽게 고민과 답답함이 풀려 있었다. 생과 사를 오가는 만큼의 젊은 시절의 고민까지도 휘파람이 되어 날아가 그림자도 남아있지 않았다.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사랑을 했고 전쟁을 하며 길을 잃거나 실수로 살인을 저지르며 도움을 청하고 읍소하며 애걸하고 미래를 가고 외국을 여행하며 끝없는 우주처럼 희로애락을 느꼈다. 현대소설부터 고전까지 국외를 가리지 않으며 자유로운 비행을 했다. 소설 속 인간들에게는 껍데기가 없었다. 원초적인 욕망에 대하여 말하기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인생을 걸었다. 그것만이 펜을 쥔 목적의 전부라는 듯 열정의 온도계를 보여주었다. 나를 그러한 경험으로 이끌어주는 소설과 함께 하는 동안만큼은 인물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 혹은 그녀를 공감했다. 떠나려는 그를 붙잡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도려내어 그의 다리 위에 올려놓는 아르까지나의 심정을 느꼈고 자신을 애타게 찾는 가족들에게 나타나지 못하는 그레고린의 심정을 느꼈다. 훌륭한 작가로부터 나오는 영혼의 민낯은 어찌나 투명한지 나의 민낯이 반영되어 내 눈에 들어왔다. 내 안에도 모든 면모가 있음을 보게 된 그 이상 공감할 수 없는 인물은 없었다. 이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이 세상 아래에 이해를 할 수 없는 사람은 없다는 걸 이해하게 됐다. 이해하지 않는 사람은 단지 나 자신임을 인정하게 됐다. 판단은 기준에 의해 만들어진 가공식품과 같은 것임을 새기게 되었다. 인간은 불완전함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아주 작은 아픔이 없이도 이해하게 되었다. 책은 인간과 세상을, 나 자신과 나를 힘들게 하는 누군가에 대하여 상처가 없이도 공감하도록 안전하게 알려 주었다.
며칠 전 공연예술을 하는 친구와 만나 서로의 작업 방식을 나누다 급변하는 시대와 예술과의 상관관계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나누게 됐다. 하나의 공연을 올릴 때 보통 2개월 이상의 연습과정을 거치는데 예전에는 10 to 10 (10시부터 10시까지 하는 연습)을 당연하게 여겼다면 요즘에는 보다 효율적으로 시간을 쓰는 곳이 많아진 것처럼 무작정의 시간을 쓰는 일에 ‘비효율적’이며 ‘비생산적’이란 시선을 보내는 게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이다. 나는 사람들이 배우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빠르고 쉽게, 간편하고 대신하여 결과를 내놓는 극도의 효율성이 기술화되어 가고 있는 현시점보다 앞으로의 발전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라 전문가들은 가까운 미래를 예측한다. 오래 붙잡고 있는다고 해서 더 나은 성과가 나온다는 보장은 없지만 이전에는 그 ‘보장이 없는 일’에 무모하고 무식하게 무언가를 걸었다면 요즘은 도태되고 답답한 시선을 적잖게 받는다. 사람들은 앞으로 완벽하게 빠른 것에 익숙해질 것이다. 미술관에 가서 그림 앞에 서 있는 3분을 못 견디게 될 것이다. 옆에 붙은 QR코드를 찍거나 AR 안경을 착용하며 바로 해석해 주는 것에 만족할지도 모른다. 작품을 음미해보기도 전에 판단을 할지도 모른다. 나는 ‘경험’이 사라질까 두렵다고 고백했다. 영혼의 밥줄이 끊길까 무섭다고 말했다. 그 경험은 나를 오늘날까지 버티게 해 준 '힘'이었기에 예술을 하는 '심장'이기에 종식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지하철에서 핸드폰을 보는 사람들을 보면 이미 종식의 위기가 시작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들은 표정을 빼앗기고 있다. 그렇다면 예술의 본질도 달라져야 할까? 대중이 바라는 식의 형태로 만족을 일으키는 속도로 예술이 발맞춰 변화를 해야 하는 걸까?
책은 나에게 좋은 친구이자 훌륭한 스승이며 그늘이 되어 주었지만 예술과 사랑에 빠지게 해 준 주선책이 되어주기도 했다. 책을 읽으며 만들어진 낭만력과 상상력은 일상에 핀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갖게 해 주었고 종이 안에 갇힌 그림을 관람하게끔 호기심을 일으켜 주었으며 소리가 없는 아쉬움을 채우도록 관심을 움직이게 했다. 예술은 그에게 무지한 나를 너그러이 안아주며 과분한 감동을 내어주었다. 사조를 몰라도 그림을 느낄 수 있었고 작곡가를 몰라도 음률은 귀를 통해 심장을 건드렸다. 좋은 작품에는 머물게 하는 힘이 있었다. 발걸음을 떼지 못하게 잡는 힘이 있었다. 애를 쓰지 않아도 노력을 하지 않아도 붙잡는 강렬함 혹은 위대함이 있었다. 그들의 아름다움에 중독이 되어 점점 찾아다니게 되었고 이해하고 싶어졌다. 아름다움의 선순환은 그림을 통해 너에게로 이어졌고 내 앞에 있는 너에게서 어느새 아름다움을 찾게 되었다. 아름다움은 내가 생각하던 고귀함과 안전한 곳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다채로운 색으로 주변에 존재했고 다양한 냄새로도 느낄 수 있었다.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을 가지게 되자 가난과 배신의 상처를 입고도 희망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 모든 감정과 느낌, 깨달음과 성찰 모든 걸 '경험'이라고 하며 예술을 통해 얻은 경험들은 나를 그러한 시절에서 극복하게 잡아 주었으며 더 나은 세상을 꿈꿀 수 있도록 도모하는 등불이 되어 주고 있다.
역사를 뚫고 버텨낸 뿌리 깊은 예술작품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단, 3분을 버틸 수 있는 힘만 있다면 이 소중한 ‘경험’이 멸종될 일은 없다고 믿는다. 세상에 핀 아름다움은 고통으로 가득 찬 삶일지라도 존재의 가치가 충분하다는 걸 들려주는 강력함이 있다. 그 아름다움은 미술관과 무대에도 있지만 저무는 노을과 오후 4시에 내리는 해의 빛에도 있다. 당신이 견뎌낸 힘겨움 속에서도 있고 별 하나 찾기 어려운 어두움이 가득한 밤하늘에도 있다. ‘낭만력’과 ‘상상력’은 기를 수 있는 '근육'이다. 자신과 예술을 만나게 해 줄 씨앗이 어디에 숨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처음에는 약간의 참을성이 필요하겠지만 세상에는 공짜로 얻어지는 게 없듯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도 그냥 가질 수 없기에 매일 헬스장을 가듯이 매일 찾는다면 어느 날 예술의 렌즈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바로 당신의 옆에서 당신의 눈과 마주치기를 고대하며 존재할 것이다. 영원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