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공자로서 가장 힘들었던 점을 꼽자면 뭘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과 고민을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신인시절은 365일 중 대부분을 일이 없는 날을 보내야 하는 시기였고 언제 잡힐지 모르는 오디션을 잘 기다리는 게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돈은 없는데 시간은 많던 시절, 나는 집 앞 대형서점으로 출근을 했었다. 특유의 향, 포근한 정적이 맞이하는 그곳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매대를 어슬렁 거리다 눈에 띄는 표지가 있으면 집어 들고는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었고 재밌다 싶으면 본격적인 독서를 위해 구석진 곳을 찾아 들어갔다. 빼곡히 채워진 책장 사이에 앉아 있으면 은밀한 곳에 숨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 시간이 좋았다.
에세이를 읽을 때면 불안정하고 해낼 게 없는 작은 나 자신이 사라졌다. 단단하고 차분하게 현재를 살고 있는 어른의 시선을 빌릴 수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잘 견뎌냈다. 소설을 읽을 때면 강렬한 그들의 욕망에 반해 무엇이든 해낼 수 있겠다는 화끈한 심장을 잠시 가졌고 여행책을 읽을 때면 성공한 인생을 사는 기분이 들어 며칠을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책은 좋은 친구와 스승이 되어 주었고 아름다움이 보이는 렌즈를 만들어 주었다. 가난과 결핍을 짊어 맨 이십 대의 청춘에게 낭만의 불씨가 되어주었다. 힘겨운 시간을 책과 함께 버틴 덕분에 이야기를 들려주고픈 사람이 된 것 같다. 나의 이야기와 연기가 당장의 오늘을 잘 살 수 있게 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아서 그래서 버티는 것 같기도 하다.
세상의 속도에 저항하듯 긴 호흡을 추구하는 나는 그곳에 있는 감동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하루하루를 상상력으로 버틴 날들이 가져다준 지금의 나를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통으로 가득 찬 삶일지라도 존재의 가치가 충분함은 1분을 버티는 힘에서 나온다. 오후 네시에 내리는 노란빛을 볼 수 있다면 가을 하늘의 높이를 알아차릴 수 있다면 겨울이 오는 바람의 신호를 맡을 수 있다면 나머지 시간은 흐름에 맡겨보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그뿐이다.
당신의 1분을 이 글에 써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