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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희수 May 11. 2023

이나리야마 철검과 고대 한국어

115자의 금빛 명문 속에 숨겨진, 고대 한국어의 모음 체계에 대한 단서

어떤 학자들은 고대 한국어의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광개토왕릉비를 꼽습니다. 고대 한국어 시기 당시의 문장으로 된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고, 전해지는 것은 지명과 인명 등의 고유 명사뿐인데, 광개토왕릉비에는 당시 고대 한국어를 사용했던 지역의 지명 (주로 광개토왕이 정복한 백제 촌읍의 이름)이 풍부하게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는 고대 일본어의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이나리야마 고분 출토 철검(稲荷山古墳出土鉄剣, 통칭 金錯銘鉄剣)'의 명문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 국보 '이나리야마 고분 출토 철검(稲荷山古墳出土鉄剣)'. 사이타마 현 교다 시에 위치한 '사키타마 사적 박물관(さきたま史跡の博物館)' 국보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다.


이나리야마 고분은 서기 6세기 전후 조성된 사키타마 고분군 (사이타마 현 교다 시)에 속한 고분들 중 하나인 이나리야마 고분에서 1968년 출토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그 진가가 밝혀지지 않았다가, 1978년 X선 촬영에 의해 금 상감 기법으로 새겨넣어진 글자가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어 이후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사키타마 고분군이 있는 곳에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박물관이 세워져서 금빛의 명문이 선명하게 복원된 이나리야마 철검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습니다. 115자의 명문 내용은 다음과 같은데, 주로 철검의 주인의 조상 계보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고유 명사는 철검이 만들어진 당시의 추정 발음에 따라 한글로 표기하고, 옆에는 8세기 고대 일본어 발음에 대응하는 알파벳 표기를 덧붙였습니다.


(앞면)

辛亥年七月中記
신해년 [서기 471년 또는 531년으로 여겨짐] 7월에 적는다.

乎獲居臣
신하 오와게(wowakë),

上祖名意富比垝
시조의 이름은 어버비과(öpöpîkô),

其児多 [名?] 加利足尼
그 아들의 이름은 가리조고네(karisukune),

其児名弖已加利獲居
그 아들의 이름은 데여가리와게(teyökariwakë),

其児名多加披次獲居
그 아들의 이름은 다가바지와게(takapasiwakë),

其児名多沙鬼獲居
그 아들의 이름은 다사긔와게(tasakïwakë),

其児名半弖比
그 아들의 이름은 반데비(paⁿdepî),


(뒷면)

其児名加差披余
그 아들의 이름은 가자바예(kasapaye),

其児名乎獲居臣
그 아들의 이름이 신하 오와게(wowakë)이다.

世々爲杖刀人首奉事來至今
대대로 칼을 든 사람의 우두머리를 맡아 지금까지 봉사해 왔다.

獲加多支鹵大王寺在斯鬼宮時
와가다계로(wakatakêru) 대왕의 조정이 세긔(sikï)의 궁궐에 있었을 적에

吾左治天下
나는 대왕께서 나라를 다스리시는 일을 도우며

令作此百練利刀
백 번을 벼린 이 날카로운 칼을 만들도록 명했으며

記吾奉事根原也
이에 내 봉사의 근원을 밝혀 적는다.


그런데 어느 고대 일본 관리의 계보를 적은 이 명문이 고대 한국어 연구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대 일본어의 한자 표기의 역사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고대 일본어 한자음의 체계들


6세기에서 8세기 사이에 고대 일본어에서 사용된 한자음은 Miyake (2003)의 용어를 따르자면 C, D, E 체계의 셋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D 체계는 대표적으로 '고사기' (712), E 체계는 '일본서기' (720)의 기록에 나타나는 고대 일본어 한자 표기의 기준이 된 한자음이고, C 체계는 이보다 이른 서기 6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나리야마 철검의 명문 역시 대왕이나 궁궐의 이름 등을 제외한 오와게의 조상 계보에 대해서는 C 체계를 사용한 표기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C 체계 한자음에는 여태까지 설명되지 못한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철검의 명문에 나타나는 '궤(垝)'라는 한자가 8세기의 kô [고] 발음에, '피(披)'라는 한자가 8세기의 pa [바] 발음에 대응하는 것입니다. 또한 '거(居)'는 당시 이 한자의 발음과 매우 가까운 kö [거] 발음이 일본어에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kë [게] 발음에 대응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고대 한반도 국가, 그 중에서도 아마도 백제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Miyake (2003)를 비롯한 기존 연구에서도 다뤄진 바와 같이, E 체계를 제외한 고대 일본어의 한자음은 대체로 백제를 통해서 들어왔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C 체계의 경우 '일본서기'에 인용된 소위 '백제 3서'로 불리는 백제계 (백제에서 만들어졌거나, 또는 백제 멸망 후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인들이 썼다고 여겨지는) 역사서에서도 8세기의 kô에 해당하는 일본어 발음을 이나리야마 철검의 '궤(垝)'와 유사한 한자인 '궤(跪)'로 표기하는 현상이 나타나, 이나리야마 철검과의 뚜렷한 연관점이 확인됩니다.


그렇다면 백제 사람들은 고대 일본어 발음을 왜 '이상하게' 표기한 것일까요? 예를 들어 kô [고]라는 8세기 일본어 발음을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궤(垝)' 또는 '궤(跪)'라는 복잡한 한자를 굳이 사용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8세기 일본어 자료에서 나타나듯이 '고(古)' 같은 한자를 사용하면 그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궤(垝)' 또는 '궤(跪)'의 당시 중국어 (전기 중세 중국어)에서의 운모 -jwe [ㅞ]가 '피(披)'의 운모 -je [ㅖ]에 개음 -w-가 더해진 것에 불과하다는 점에 착안한다면, 일종의 비례식을 통해 '궤(垝)' 또는 '궤(跪)'로 표기된 kô [고]는 그 당시의 발음이 kô [고]가 아니라 *ku̯a [과]였음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고대 일본어의 연구를 통해서도 일부 ô [ㅗ]가 *u̯a [ㅘ]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을뿐더러, kô [고]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더 이른 시기 (3세기)의 중국 기록인 '삼국지'에서도 觚 (후기 고대 중국어 *kˤwa [과])의 표기가 발견되어 *ku̯a의 복원을 뒷받침합니다. 여전히 '피(披)'의 운모 -je [ㅖ]가 왜 일본어의 a [ㅏ] 발음을 나타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jwe [ㅞ]가 ô [ㅗ]를 나타내는 현상은 'ô [ㅗ]의 당시 발음이 *u̯a [ㅘ]였다'라는 결론은 간단하게 도출됩니다.


이와 같이 C 체계 한자음의 특수성 가운데 어느 부분은 중국어와 일본어의 음운사에 대한 지식을 통해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居)'가 왜 kë [게] 발음의 표기자로 쓰이는지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습니다. '거(居)'의 당시 중국어 발음은 kjo /kɨə/ [거]이고, 당시 일본어에는 이와 매우 유사한 발음인 kö [거]가 존재했으므로, 둘 사이에 대응이 존재할 것이 기대되기 때문입니다. 이 중요한 의문은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고대 한국어에는 *ə [ㅓ]와 같은 중설 모음 발음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대 한국어에서는 중국어의 -jo /-ɨə/ [ㅓ] 발음을 *e [ㅔ] 표기에 대신 사용했고, 일본인들은 한반도를 통해 한자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중국어에서의 원래 한자 발음을 모르고 고대 한국어에서의 용법을 따라 그대로 고대 일본어의 ë [ㅔ] 발음 표기에 중국어 -jo /-ɨə/ [ㅓ]를 사용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고대 한국어에 중설 모음이 없었다고?


후기 중세 한국어 (15세기)나 현대 한국어에는 ㅡ /ɨ/와 ㅓ /ə/로 표기되는 2개의 중설 모음 음소가 존재하기 때문에, 고대 한국어에도 중설 모음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기존 연구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특히 '어라하(於羅瑕)'나 '건길지(鞬吉支)' 등 중국의 기록에 등장하는 고대 한국어 단어들이나 '삼국사기' 지리지에 기록된 삼국 시대의 지명 표기에 중국어에서 중설 모음을 가지는 한자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그 절대적인 증거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세밀하게 검토해 보면 고대 한국어에 중설 모음 음소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소부리(所夫里)'에서 '사비(泗沘)'로 그 명칭이 변화한 백제의 6–7세기 수도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사비(泗沘)'는 두 글자 모두 전기 중세 중국어 -ij /-i/ [ㅣ] 모음을 가지는 글자들인 반면, '소부리(所夫里)'는 세 글자 모두 당시의 중국어 발음 기준으로는 중설 모음 -jo /-ɨə/ [ㅓ] 또는 -i /-ɨ/ [ㅡ]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부리(夫里)' 부분은 '삼국지'의 마한 소국명 표기에 나타나는 '비리(卑離)'와 같은 단어로 여겨지고 있는데, '비리(卑離)'의 후기 고대 중국어 발음은 *pe re로, 두 글자 모두 B형 *e 모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비(泗沘)'라는 표기가 정해진 시점 (아마도 사비 천도가 이루어진 538년)에는 이 지명이 고대 한국어에서 전설 모음 *i [ㅣ]를 가졌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편, '비리(卑離)' 역시 전설 모음 *e [ㅔ] 또는 *i [ㅣ]를 나타내고 있는 표기입니다. 그런데 '소부리(所夫里)'의 모음을 중설로 본다면 전설 모음이 중설로 변화했다가 다시 전설로 변화했다는 식의 설명이 필요해집니다. 이보다는 '소부리(所夫里)'라는 표기가 반영하는 모음이 실제로는 *e [ㅔ]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비리(卑離)' 역시 *e를 반영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서기 500년 전후에 전설 중모음 *e가 전설 폐모음 *i로 상승하는 하나의 변화만으로 모든 표기가 잘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고대 한국어 모음 *e [ㅔ]를 고대 한국어 화자들이 굳이 당시 중국어에서 중설 모음으로 발음된 한자를 이용해 표기한 이유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후기 고대 중국어에서 전기 중세 중국어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모음 꺾임(vowel warping) 현상 때문에 순수한 *e [ㅔ]에 대응하는 발음이 중국어에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중국어가 원래 가지고 있던 *e는 -je /-ie/ [ㅖ]로 변화했으므로, 고대 한국어의 *e [ㅔ]가 선행 자음의 경구개음화를 유발하지 않는 모음이었다면, 고대 한국어 화자들의 입장에서는 중국어의 -je /-ie/ [ㅖ]보다 -jo /-ɨə/ [ㅓ]가 고대 한국어 *e [ㅔ]에 더 가깝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삼국지'에서는 한반도의 고대 국가 진한(辰韓)에 대해 설명하면서 진한 사람들이 중국 진(秦)나라에서 건너온 유민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진한(辰韓)을 진한(秦韓)이라고 발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고대 한국어에 중설 모음이 없었다면 매우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 '진(辰)'의 후기 고대 중국어 발음은 *dʑɨr [즐]이고, '진(秦)'은 *dzir [질]로 발음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대 한국어 중설 모음의 존재를 부정하는 해석에 따르면 고대 한국어 화자들은 '진(辰)'이라는 한자를 중국어 발음대로 *dʑɨr [즐]로 발음하지 못하고 *dʑir [질]이라고 발음했을 것이고, '삼국지'의 기록자에게 이것은 '진(辰)'보다는 '진(秦)'의 중국어 발음에 가깝게 들렸을 것이며, 그러한 관찰에 자신의 상상력을 덧붙여 진한 사람들이 중국 진나라에서 건너왔다는 기록을 만들어내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단순한 역사 왜곡으로 느껴지는 거짓 서술도 단순한 창작이 아니라 어떤 실제의 현상에 영향을 받은 경우가 있으므로 주의 깊게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나리야마 철검의 중요성


고대 한국어에 중설 모음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관찰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고대 일본어 한자음의 C 체계이며, 이나리야마 철검은 C 체계 표기법으로 된 수많은 자료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나리야마 철검의 명문은 '궤(垝)'라는 글자를 사용하고 있어서 '궤(跪)'를 사용하는 백제 3서의 표기법과의 직접적인 접점을 시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제작 시기가 다른 C 체계 문헌보다 훨씬 이른 서기 471년 또는 531년으로 여겨지므로 C 체계의 특수한 현상의 유래가 된 고대 한국어 특유의 한자음이 (아마도 백제를 통해) 일본으로 전해진 시기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 뚜렷한 가치가 있습니다. 즉, '소부리(所夫里)'와 같이 '부리(夫里)'라는 한자 표기가 특징적으로 사용되는 이 한자음은 백제에서는 5세기경에 활발하게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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