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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즈와케이크 Mar 01. 2022

정형돈과 자신감

스스로를 지키는 마지막 수단

 무한도전이 종영된 지 햇수로 4년. 자타가 공인하던 국민예능이자 예능 프로그램의 전설로 불리던 무한도전은 마치 별의 삶처럼, 영원할 것 같은 빛을 발하다가, 불현듯 사라지고 말았다. 장대한 전성기 때에 비하면 너무도 허무한 결말이었지만, 아직도 무한도전은 그 반짝임을 기억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여전히 유튜브 등지에서 여러 레전드 장면들이 회자되며 그 질긴 생명력을 뽐내고 있었다. 

 지금은 편집된 영상과 하이라이트들을 통해 무한도전 멤버 전원의 활약이 조명되곤 하지만, 전성기 무한도전 재미의 주축은 확실히 유돈노(유재석, 정형돈, 노홍철)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는 알래스카 특집 당시 박명수 정준하 길 조합의 번지 점프 팀과 유돈노 조합의 알래스카 팀의 분량 차이만 봐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무한도전의 하락세가 정형돈, 노홍철 이 둘의 하차 때부터 가속되기 시작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돈노 조합이 무한도전의 핵심이었음은 분명했다.

2010년 연말정산 특집에서 강명석 팀장이 유재석 정형돈 노홍철을 칭찬하면서 나왔던 장면.

 이후 정형돈이 정신건강을 이유로 무한도전에서 하차하게 되었을 땐 시청자들은 모두 당혹감을 먼저 내비쳤다 무한도전의 주축 중 한 명이자, 진상 콘셉트와 극대노 개그로 시청자들의 웃음을 유발했던 그가 정신 건강을 이유로 방송을 중단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충격이었기 때문이었다.  


 정형돈의 예능감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비록 무한도전 방영 초기에는 웃기는 것 빼고 다 잘하는 연예인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캐릭터를 얻기도 했었지만, 무한도전이 전성기를 맞이했을 때 정형돈은 숨겨왔던 예능감을 제대로 터트리면서, 미존개오라는 호칭과 함께 프로그램 재미의 핵심을 담당하곤 했었다. 지금도 회자되는 무한도전 레전드 장면들의 대부분에는 정형돈이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그의 활약은 자타가 공인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예능감뿐만 아니라, 다른 방면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곤 했었다. "무한도전에 제가 없으면 그 자리는 형돈이 거예요."라고 얘기한 유재석의 발언이 허언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듯, 주간아이돌, 아이돌 룸과 같은 아이돌 예능 프로그램에선 예능 MC로써의 재능을 드러냈으며, 방송인이라는 틀을 벗어나도 삼성전자를 나온 공고 출신에다 합기도와 태권도를 수련하여, 불타는 링을 앞구르기로 뛰어넘을 수 있는 운동신경을 보여주는 등, 방송에서 비치는 진상 예능인 콘셉트와는 다르게 여러 방면에서 기본이 탄탄하게 잡힌 사람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형돈은 언제나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는 무한도전에서 명실상부한 인기 캐릭터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와중에도 여기가 내 자리가 맞나 하는 의구심을 품고 있었고, 방송에선 언제까지 내가 방송으로 벌어먹고 살 수 있을까, 하는 회의를 내비칠 정도로 본인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다. 결국 그의 불안은 점점 기우를 넘어 그의 몸을 잠식해갔고, 2015년엔 불안장애로 인한 정신건강 악화로 인해 모든 방송활동을 잠정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무한도전 정신감정 특집에서 정형돈의 심리분석 결과를 설명하는 장면, 정형돈 스스로의 내적 갈등이 심할 것이라고 분석함.    6년 뒤 그의 정신건강 악화를 예지한 듯하다.

 정형돈이 무한도전에서 보여준 활약들은 그의 재능이 무한도전을 넘어 미래에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이루어놓은 일들에 대한 자신감조차 가지지 못했다. 수많은 관객 앞에 서서, 타인의 평가로 가치가 결정되는 방송인으로서 그는 시청자 모두에게 인정을 받아 분명히 성공한 방송인이었지만, 정작 가장 자랑스러워야 할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지 못해, 삶의 평정심을 잃어버린 안타까운 사람이었다.


 정신승리와 자기 합리화는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만 사용되는 단어들이지만, 이는 거꾸로 자신의 심리가 궁지에 몰렸을 때 평정심을 유지하는 최후의 수단이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정형돈이 안정적인 현재와 인정받은 삶 속에서도 불확실로부터 자신을 지키지 못해 무너진 것처럼, 여러 불안요소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주제 파악은 상황을 현실적으로 바라보는 데에 도움을 주긴 하지만, 만약 치열하고 팍팍한 현실과 불확실하기만 한 미래 앞에서, 다 잘될 거야 라는 낙관과 나는 극복해낼 수 있을 거라는 일말의 자신감마저 없다면, 현재는 그저 고통뿐이고 미래는 기대할만한 가치도 없는 어둠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기에 무엇도 자신을 보호해줄 수 없는 상황 속에선 스스로라도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만 한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고 미래는 어떻게든 잘 될 것이다 라는 암시가 비록 근거 없는 자신감이거나 막연한 낙관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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