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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곶 Sep 17. 2021

태양을 닮은 꽃,해바라기

스토리가 있는 꽃이야기 1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도쿄올림픽은 정작 뚜껑이 열리자 코로나19로 우울한 이들의 마음에 한줄기 위로가 됐다. 우리들은 메달의 색에 연연하지 않을 만큼 달라진 분위기와 젊은, 혹은 어린 선수들 각자의 스토리가 담긴 투혼에 울고 웃었다.
혼자 메달을 걸고, 쟁반에 놓인 꽃다발을 집어 들고 찍는 메달리스트들의 기념사진. 그들이 손에 든 소박한 꽃다발에는 노란 해바라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양궁 3관왕 안산선수가 든 소박한 꽃다발의 해바라기 -TV화면 캡처

해바라기가 세슘을 다량 흡수하기 때문에 체르노빌 방사능 피해지역에 심었다는 사실에 후쿠시마가 겹쳐지기는 했지만, 활짝 웃는 선수들을 닮은 해바라기가 암울한 세계에 희망이 되어준 그들에 대한 감사 표시라 생각하고 싶다.
하긴 미국 공업지대 디트로이트의 납으로 오염된 토양을 해바라기가 43% 정화시켰다는 기록을 보면 해바라기의 오염정화능력은 사람의 실수를 덮어줄 만해 보인다.
더욱이 가벼운 해바라기 줄기로 만든 구명조끼 덕에 타이타닉 승객 중 일부가 생명을 건졌다는 에피소드 또한 희망의 상징에 걸맞는다.


해바라기는 아메리카 대륙이 원산지로 그 재배 역사가 3천 년을 넘는다.    
고소한 해바라기씨는 고급 지방산을 가지고 있어서 간식으로도 식용유로도 먹으며, 줄기는 설탕과 알코올을 만들고, 사료용으로도 쓰인다.

유럽인들이 배를 타고 건너오기 전까지 수천 년 동안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해바라기를 키우며 풍요롭고 평화롭게 살아갔을 것이다.


태양신을 섬겼던 아즈텍 문명은 태양을 닮은 해바라기를 다양하게 활용했다. 순금 해바라기로 신전을 장식하고, 사제들은 해바라기관을 머리에 썼으며, 방패에도 해바라기를 장식했다. 특히 세부족이 합친 삼각동맹을 뜻하는 아즈텍의 문장에서 테츠코코 부분은 해바라기 문양으로 보인다.  

아즈텍 삼각동맹 중 해바라기로 보이는 테츠코코 부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으로 전해진 해바라기는 '태양의 꽃', '황금꽃'으로 불렸다. 아메리카를 황금이 쏟아지는 보물창고로, 약탈지로 삼았던 당시 유럽인의 눈에 신대륙 들판에 핀 황금색 해바라기가 자신들을 돈방석에 앉혀줄 반가운 표상이라 여긴 걸까?

얼마전 캐나다의 원주민 기숙학교에서 수백구의 어린 학생들이 집단 매장된 유해가 발견되었다. 총칼을 앞세워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한 지배자들은 원주민 강제 동화 과정에서 아이들을 부모에게 빼앗아 130여 개의 기숙학교에 분산시키고, 식민지배에 순응하게끔  집단 교육시켰다. 고유의 언어도 문화도 빼앗긴 채 비위생적이고 난방도 안되는 곳에서 신체적 정서적 학대를 받던 학생들 다수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침략자들에게 아메리카는 해바라기를 키우던 수많은 원래 주민의 땅이 아닌 기회의 땅에 불과했기에 그 당시 희생된 이들과 그들이 빼앗긴 역사는 그저 잊혀졌다.  
아픈 역사는 공감된다.
코로나19로 집콕하는 미국인들이 키우는 애완용 새가 늘면서 새 모이 용으로 캐나다 해바라기씨 수요가 급등했다는 기사에 삽입된 해바라기농장 사진에서 캐나다 원주민 아이들의 가슴 아픈 사연이 떠오르고, 소피아 로렌의 영화에 등장하는 구 소련의 해바라기 밭 장면에서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당했던 우리 민족이 겹쳐졌다.

소피아 로렌이 등장한 1982년 영화 '해바라기'캡처화면
2차대전 희생자들의 끝없는 묘지-영화 '해바라기'캡처화면

영화 속 주인공이 찾은 2차대전 희생자들의 끝도 없는 무덤과 끝없는 해바라기 밭 장면은 다른 듯 닮아 있다. '해바라기' 영화 속 2차대전의 희생자에게는 십자가 모양 비목이라도 있지만 땅을 빼앗긴 캐나다 원주민 아이들에게도, 나라를 잃고 시베리아 황무지로 쫓겨나던 중 열차에서 죽어간 우리 아이들에게도 주검을 위한 묘비 하나 허락되지 않았다.


누구나 해바라기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화가가  빈센트 고흐일 것이다. 독한 술인 압상트를 달고 살았던 고흐는 그  중독 증세로 세상이 온통 노랗게 보였기에 해바라기도, 배경도 온통 노랗게 그렸다.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 온통 노랗게 보이지만 농익은 해바라기 씨의 어두운 부분 덕에 노란빛이 돋보인다-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생전에는 그림 한 장 팔지 못하고 불행하게 생을 마감한 가슴 아픈 스토리가 담긴  그의 해바라기 그림에는 밝고 화사한 노란색을 돋보이게 하는 어두운 색이 저변에 깔려있다.

고흐의 노란 해바라기 그림은 온통 노랗게 보이지만 설상화가 없는 농익은 해바라기를 여럿 그려넣은 덕에 노란빛이 돋보인다.

밝음을 밝게 보여주는 것은 어둠이다.

노란 황금꽃을 기대하고 갔다가 만난 수정된 해바라기. 고흐는 설상화가 없는 열매부분을 여럿 그려서 노란빛을 돋보이게 했다

커다란 꽃 한 송이로 보이는 해바라기는 사실 꽃대 하나에 수백 개의 작은 꽃들이 뭉쳐 머리 모양을 이룬 두상화(頭狀花)다.
꽃이라 하면 암술과 수술을 갖춰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생식기능을 말한다. 혀 모양의 노란 설상화를 보고 찾아온 벌들은 오글오글 모인 적갈색 대롱 모양의 작은 꽃들을 오가며 두상화(頭狀花) 하나에 수백 개의 열매를 쏟아놓는다.

혀모양 가짜꽃(설상화)을 보고 모여든 벌들이 대롱모양의 진짜꽃을 수정시키고 있다

해바라기는 중심부터 시계방향과 반시계 방향의 나선형 패턴이 완벽한 대칭으로 맞물려있다. 최소한의 공간에서 서로 겹치지 않고 최대한 많은 수의 씨앗들을 밀집하게 배치해서 피보나치수열과 황금비의 정석을 보여주는 것이다.

피보나치수열과 황금비의 정석을 보여주는 해바라기 수열

영화 '해바라기' 촬영지 우크라이나나 돈키호테의 고향인 스페인의 라만차에 끝도 없이 펼쳐진 해바라기 농장이 장관이라는데, 코로나로 언제 가볼지는 기약이 없다.
그러나 멀리 가지 않더라도 가까운 곳에서 멋진 해바라기밭을 만날 수 있다.

경기도 연천의 호로고루성을 찾았다.
호로고루성은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고 남하정책을 펼치면서 임진강변에 쌓은 고구려군의 요새로 돌을 쌓아 만든 석축과 그위에 다진 토성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휴전선 남방한계선이 지척이다 보니 일부러 찾아가기는 힘든 곳이지만 이곳 벌판에 주민들이 뿌린 해바라기씨가 꽃 탐방객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해바라기라지만 올해 유난히 개화시기가 빠른 데다가  부지런한 벌들 덕에 그 열매 맺음과 함께 가을의 끝을 고할 것이다.


눈이 시리도록 처연한 하늘과 어우러진 노란 해바라기가 더욱 빛나 보이고 아쉬운 까닭이다.

경기도 연천 호로고루성 주변에 활짝 핀 해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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