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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민지 Apr 14. 2023

<이니셰린의 밴시> 다정함과 성취는 양립할 수 있을까

이동진 평론가는 어떻게 그 많은 영화와 책을 봤냐는 질문에 인간관계가 망하면 된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에너지가 외부로 향하는 인간관계와 에너지가 내부로 향하는 공부, 창작 같은 정신적 몰입은 양립하기 어렵다. 인간관계에 할애하는 시간과 에너지가 크면 공백도, 자기 자신과의 대화도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만족감을 주는 타인과의 관계로 삶이 꽉 찼을 때는 달리 다른 게 필요하지 않다. 나는 홀로 몰입하기를 사랑하지만,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 즐겁고 편안한 것도 없다. 하지만 이는 두 가지 사이에 어떤 위계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를 택하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결혼 후에 그전만큼 날 선 가사를 쓰지 못하는 뮤지션들의 경우도, 영화 라라랜드에서 꿈과 사랑이 어긋나던 순간 또한 그렇다. 공백은 창작과 몰입의 필요조건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니셰린의 밴시>의 콜름의 절교 선언은 합당하다. 절친이었던 파우릭을 독하게 끊어내지 않으면 해야만 하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콜름은 인생의 노년기, 죽음을 앞두고 있다. 죽기 전에 곡을 완성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콜름은 더 이상 파우릭과의 무의미한 대화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다고 한다.


콜름에게 파우릭은 다정하지만 영양가 없는 말만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파우릭이 정말로 영양가 없는 사람일까. 예술가인 콜름은 위대한 작품을 남기는 것을 인생 최고의 가치라고 여기지만, 파우릭은 이 세상에 남는 건 예술 작품이 아니라 다정함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파우릭이 좀 모자란 사람처럼 보여도 당나귀를 집 안으로 들일 정도로, 콜름에게 분노하면서도 콜름의 개는 지켜줄 정도로 다정함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이상하게도 그놈의 정이 오히려 갈등을 키운다. 파우릭의 문제는 이런 것이다. 외로움 그게 뭐야? 하면서 자신의 외로움을 깊게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콜름과의 관계에도, 타인의 시선에도 그토록 집착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는 삶을 바꾸기 위해서 여러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콜름은 파우릭 대신 음대생들과 어울리며 만나는 사람을 바꾼다. 파우릭의 동생은 오빠와 헤어지는 게 마음 아프지만 자신의 미래를 위해 섬을 떠난다. 그리고 파우릭은 소중한 것들을 잃고 남겨졌다. 이제야 파우릭이 자신의 외로움을 깊게 들여다볼 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나는 이것을 기회라고 부르고 싶다. 삶에서 외로움을 들여다볼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고, 또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신기하게도 가까웠던 인연들이 어떤 해에 모두 물갈이 됐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내게 기회였다. 혼자가 될 기회, 혼자 몰입할 기회. 콜름 같은 사람들은 그런 기회를 스스로 만들지만 나와 파우릭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런 환경이 주어져야만 한다.


헤어짐은 나로 하여금 아예 다른 방식으로 살게 한다. 거의 모든 것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 삶에서 사라진 후 함께 술을 마시는 대신 홀로 트랙 위를 달렸고, 메시지를 나누는 대신 혼자 글을 썼다. 새롭게 살 수 있는 환경이 완벽하게 조성된 것이다. 어쩌면 콜름의 과거는 파우릭이었고, 파우릭의 미래는 콜름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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