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풀타임>을 보고
출근하는 엄마를 대신해 나는 여러 여자들 손을 거쳐가며 자랐다. 90년대 초반이었던 당시 동네 엄마들은 공식적인 육아 시설을 대신했다. 엄마들은 알음알음 입소문이나 전봇대에 쪽지를 붙여 영업했다. 나는 그 엄마들 집을 옮겨 다녔고, 내 머리 스타일은 엄마들의 취향에 따라 삐삐 머리일 때도 볶은 머리일 때도 있었다.
엄마들의 사정으로 나를 돌볼 사람이 없어지자 나는 놀이방이라 불리던 곳으로 갔다. 놀이방에서는 한글을 배우고 소시지 반찬을 먹고 낮잠을 잤다. 그러다 또래 애들이 하나 둘 엄마 손을 잡고 나갈 때까지 엄마는 오지 않았다. 해가 진 후 놀이방 선생님과 단둘이 남고, 꼭 울음이 터지고 말았을 때 엄마는 나를 데리러 왔다. 엄마가 일찍 퇴근하는 토요일만을 기다렸고, 일요일에는 아침부터 엄마 손에 이끌려 목욕탕엘 갔다. 다시 월요일. 엄마는 밥투정하는 나를 어르고 달래서 출근했다가, 또 다른 집에 맡긴 동생까지 업은 채로 퇴근하면 전쟁 같았던 아침의 흔적을 고스란히 맞이했을 것이다. 나를 데리러 오는 엄마의 조급한 퇴근길과 나의 울음은 긴 시기 동안 계속됐다. 젊고 푸석했던 엄마의 얼굴, 그리고 내일은 절대 울면 안 된다던 당부에서 그 시절 엄마 주위를 감싸던 피로의 공기를 희미하게 기억한다.
영화 <풀타임>의 쥘리를 보는 내내 그 시절 엄마를 생각했다. 아이 둘을 혼자 키우며 교외에서 파리로 출근하는 쥘리. 전국적인 파업으로 교통이 마비되자 쥘리의 일상은 휘청인다. 캄캄한 새벽부터 아이들을 먹인 후 이웃집에 맡기고 나면 쥘리의 질주가 시작된다. 아슬아슬하게 기차에 올라타고, 중간에 기차가 멈추면 임시로 편성된 버스를 찾아 헤맨다. 그마저도 없는 날엔 히치하이킹으로 간신히 통근한다.
삶의 변수에 가장 취약한 사람은 누구인가. 일상 스릴러라는 장르의 주인공이 홀로 아이를 키우며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노동자 쥘리인 이유다. 5성급 호텔의 객실 청소 업무는 재택근무가 불가능하고 객실은 파업과 상관없이 완벽한 공간이어야 한다. 조부모의 도움 없는 육아는 사실상 워킹맘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 더 이상 늦게까지 아이를 봐주기 힘들다는 이웃의 통보는 청천벽력이다. 업무는 늘어나는데 유일한 희망인 이직 면접까지 잡힌 상황. 이때 쥘리에게는 일과 가정의 영역에서 모두 대타가 필요하다. 면접을 보기 위해서는 대신 근무해 줄 사람을 구해야 하고, 생계를 부양하기 위해서는 육아를 맡아줄 사람을 다시 구해야 한다. 쥘리가 생계부양자인 동시에 주 양육자인 한 모든 게 불가능한 일 투성이다.
감독의 말대로 쥘리는 ‘전사’다. 정확히 말하면 쥘리는 전사가 되어 싸워야만 했다. 교통편이 없어 발이 묶인 와중에 출근을 위해, 면접장에 도착하기 위해 숨 가쁘게 거리를 뛰어다니는 장면은 꼭 생계와 육아의 굴레에 꼼짝없이 갇힌 쥘리의 힘겨운 발버둥과 겹쳐 보인다. 면접장을 제외하고 늘 똑같은 옷차림인 쥘리의 모습에서 내일 아침 입을 옷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는 빡빡한 삶의 일면을 본다. 더 나은 삶을 계획할 여유는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아이들이 자랄 때까지만…’ 하며 가만히 살아내는 것뿐이다.
나는 조금 더 자란 후, 초등학교가 끝나면 피아노 학원과 미술 학원을 떠돌았고 혼자 학습지 선생님을 기다렸다. 영화에서 좋은 환경에서 키우려면 파리 통근이 어쩔 수 없다는 쥘리의 말에 이웃은 이렇게 말한다. “이게 아이들에게 좋은 건가요?” 당시 엄마의 나이에 가까워진 지금의 나는 쥘리의 선택을 백번 이해한다. 내가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의 독박 육아와 가사 노동, 사무실에서도 집에서도 늘 쫓기는 마음, 가늠할 수 없는 피로를 쥘리를 통해 본다. 그러다 어느 날엔 왈칵 눈물을 쏟아냈을까. 내 삶은 엄마의, 나를 키운 여러 여자들의 노동의 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