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의 케브랑리 박물관
파리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프랑스에서는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다는데 기본적인 문장 몇 개라도 익히는 게 좋을까 싶었다. 그렇게 강남역 부근에 있는 학원에 등록하고 다니길 한 달 정도. 퇴근한 이후 저녁 시간이라 피곤해서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복습할 시간도 없고…, 이래저래 핑계 삼으며 겨우 간단한 인사말만 배웠다. 봉주르(안녕하세요), 쥬 수이 꼬레엔(저는 한국인입니다), 실 부 쁠레(저기요)!
넷플릭스 드라마 <에밀리, 파리에 가다(Emily in Paris)> 첫 번째 에피소드에는 파리의 빵집을 찾은 에밀리의 모습이 나온다. 에밀리는 프랑스어를 조금 익혔다고 써먹어 보고 싶었는지 떠듬거리며 ‘초코 빵 하나 주세요’를 외쳤다. 초콜릿 조각이 납작한 반죽 중간에 들어있어 간편하고 맛있는 빵 오 쇼콜라다.
에밀리는 ‘운 빵 오 쇼콜라(Une pain au chocolat)’라고 말했지만, 부정관사는 명사 앞에 붙을 때 남성형인지, 여성형인지 따져보고 써야 한다. 그래서 빵집 아주머니는 바로 ‘앙!’이라고 정정한다. ‘앙 빵 오 쇼콜라(Un pain au chocolat)’. 알아듣지 못한 에밀리는 안 들리는 척 익숙하지 않은 유로 동전만 뒤적거렸지만.
어차피 상대방의 대답을 알아듣지 못하면 대화가 되지 않는다. 고작 한 달 배운 프랑스어로는 안 되겠다 싶어 프랑스에서는 아예 입을 다물기로 했다. 대신 손짓, 발짓, 다채로운 표정으로 나의 의사를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빵집에서 빵을 살 때, 편집숍에서 내게 맞는 사이즈를 찾을 때, 공원에 있는 식당에서 음료를 주문할 때,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어올 때 등 프랑스어를 하지 못해도 이런 상황에서 정도야 어떻게든 말이 통하니까.
그런데 우연일까? 프랑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프랑스어는 물론이고 영어조차 쓸 일이 별로 없었다. 호텔에서는 체크인 담당하는 직원이 프랑스와 한국 혼혈이었다. 심지어 그의 할머니가 사는 동네가 내가 사는 곳과 가까워 짧은 시간에 친밀감까지 형성되었다. 쇼핑하러 갔더니 한 남자 직원이 한국학을 공부한 유학파라며 유창한 한국어로 접객하였고, 모네의 정원 기념품점에서는 한국 신용카드를 내미니 친절한 여자 직원이 또박또박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한국 사람이세요?라고.
요즘 한국이 그렇게 핫하다더니, 이게 말로만 듣던 그건가? 예전과 많이 달라진 한국의 국제적인 위상에 어깨도 펴지고, 이런 시대를 직접 경험하다니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인 걸까, 아니면 다른 한국인 관광객들에게도 벌어지는 상황일까.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라고 했는데, 도대체 얼마나 많은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한국어를 익힌 걸까. 행복하고 흐뭇한 생각에 잠시 젖었다.
게다가 파리의 유명한 한 박물관에서도 기분 좋은 일이 계속되었다. 파리의 날씨는 참 변화무쌍해서 비가 올 것 같아 호텔에서 우산을 빌렸다. 검은색 장우산이었다. 결국 비가 오지 않아 장우산은 거추장스러운 짐이 되어 지팡이처럼 짚고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우산을 들고 전시실에 입장하자 한 박물관 직원이 내게 다가왔다. 우산은 물품 보관소에 맡기셔야 해요.
나는 한 달짜리 프랑스어 학원에서 배운 ‘데졸레(죄송합니다)’를 써먹으며 최대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물품 보관소에 맡길게요. 그런데 보관소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직원은 친절하게도 나를 직원 전용 출입구로 안내하며 직접 보관소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잠깐 함께 걸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그녀는 내게 어디에서 왔냐고 물어봤다.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하자 직원은 곧바로 반색하며 한국어로 조잘조잘 말하기 시작했다. 한국이 좋아서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수줍은 모습과 아직 그렇게 유창하지 못하다는 겸손함까지 겸비했다.
프랑스의 박물관에서 한국어를 하는 젊은 프랑스 직원을 만나게 되다니. 심지어 서비스직에 일하는 프랑스 사람들은 손님이 왕이 아니라 직원이 왕이라고 들었는데, 왜 이렇게 친절한 것인가…. 장우산을 물품 보관소에 맡기러 가고 다시 돌아오는 길까지 직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황홀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 직원은 나를 특별전시가 있는 2층으로 안내해 주었다. 별로 관람할 생각이 없었던 케브랑리 박물관의 기모노 특별전시였다.
파리 하수도 박물관에서 나와 에펠탑 쪽을 향해 자크 시라크 가(街)를 걷다 보면 한 거대한 붉은 외벽의 박물관이 나온다. 1995년 프랑스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던 자크 시라크가 취임한 직후 건립하겠다고 발표했던 그 박물관, 케브랑리다. 케브랑리는 센 강 주위의 브랑리 지역에 있다는 의미로, 이름만으로는 어떤 박물관인지 아무런 정보를 전달하지 않는다. 다만, 박물관의 명칭에 설립자를 기념하듯 이름을 나란히 붙여 ‘케브랑리 박물관 – 자크 시라크(Musée du Quai Branly – Jacques Chirac)’라고 부른다.
케브랑리 박물관은 한국에는 없는 종류의 특별한 박물관이다. 인류사, 민족학 또는 다문화, 다민족 박물관이라고 표현하면 옳을까? 이곳은 유럽을 제외한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의 다양한 민족의 문화유산을 수집하고 전시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트로카데로의 인류학 박물관과 아프리카·오세아니아 문명사박물관을 통합하여 만들었다. 순전히 유럽 문화의 수장 격인 프랑스 입장에서 ‘타자’를 이해하자는 취지로 만든 다문화 박물관인 것이다. 건축을 맡은 장 누벨의 표현에 따르면 케브랑리는 ‘세계의 문화’에 바친 새로운 박물관이었다.
한국에도 비슷한 박물관들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세계문화관이 있어 중앙아시아, 중국, 일본 등지의 유물을 보관하고 전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전시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한국의 유구한 예술품들이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여러 특별기획을 통해 한국과 타문화의 문화를 비교하고 외국 문화유산을 수집하곤 하지만, 역시 주된 전시 주제는 한국의 민속이다. 그 외에도 여러 사립박물관에서 다문화를 주제로 전시를 꾸려나가지만, 주로 단순한 체험학습 위주이며 케브랑리처럼 전 세계적인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왜 한국에는 케브랑리 같은 박물관이 없을까? 케브랑리의 존재는 국가에 문화예술 분야에 투자할 예산이 많고 지역 전문가들이 양성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돈만 있어서는 안 된다. 예전에 제국주의 시절 세계 각지로 뻗어 나가며 온갖 불법적인 수단으로 긁어모은 예술품들이 기반이 되어 있다. 케브랑리에는 태평양 섬 부족들의 가면, 토템, 이누이트 부족의 의복, 의례용품 등 다양한 유물을 쌓아놓고 있지만, 정작 물건을 만든 사람들은 그곳에 없다.
그래서 케 브랑리는 태생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박물관은 2006년 개관하면서 ‘원시예술 전시관’이라는 별칭을 달았다. 유럽을 제외한 모든 지역의 문화와 예술을 주제로 삼으면서 ‘원시예술’이라 일컬은 것은 서구와 비서구의 이분법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다. 유럽과 같이 발달한 예술과 그 이외의 지역은 모두 원시예술로 퉁 쳐버린다. 그런 많은 논란과 우려의 목소리와는 상관없이 케브랑리는 대성공을 거두고 말았다. 지금도 파리에서 가장 관람객이 많은 박물관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나는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특별전시실에 입장했다. 아니요, 저는 역시 기모노 전시는 관심 없는데…,라고 말을 꺼낼 수도 없는 애매하고 느닷없는 전개였다. 그래도 한국말하는 친절한 직원이 추천해 준 데는 다 이유가 있겠지 여기며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헤어지기 전, 직원은 내게 케브랑리에는 한국 전시도 있으니 꼭 찾아보라고도 귀띔 했다. 단체 학생들이 주로 돌아다니는 1층 상설전시와는 달리, 2층 기모노 특별전시실에는 관람객이 꽤 많았다. 거의 개인 관람객이고 프랑스 현지인들인 것 같았다.
전시는 기모노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이야기였다. 특히 유럽의 시선을 중심으로 16세기부터 유럽과의 교역을 통해 어떻게 기모노가 바뀌었고, 유럽에서는 일본의 복식을 받아들였는지 보여주는 다양한 기모노가 전시되었다.
일본은 네덜란드와 교역을 통해 일찍부터 외국의 직물을 수입하고 있었다. 특히 남아시아의 ‘사라사(sarasa)’라는 무늬가 있는 옷감은 일본에서 직물 장인에 의해 ‘와 사라사’라는 형태로 개량되어 높은 인기를 누렸다. 반대로 쇼군과 다이묘에게 기모노를 선물 받은 네덜란드 상인들은 유럽에 기모노를 소개하게 되었다. 그런데 유럽에서 기모노가 엄청난 인기를 끌고, 두꺼운 충전재를 넣고 소매를 약간 개조해서 만든 개량 기모노가 팔려나갔다.
유럽인들의 눈에 일본의 공예품들은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일본으로부터 직수입하는 것으로는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자 네덜란드 상인들은 기모노를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그들이 공장을 차린 곳은 바로 인도였다. 특히 실내에서 입는 나이트가운으로 제작되었는데, 격식을 차린 장소에서 입는 원래의 기모노와 다르게 유럽에서는 편안하고 고급스러운 옷차림으로 각광받았다. 기모노의 인기는 현대까지 이어졌다. 1977년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 4에서, 마돈나의 <Nothing really Matters> 뮤직비디오에서, 데이비드 보위와 프레디 머큐리의 콘서트 등에서 기모노는 변형된 형태로, 그들의 예술 안에 녹아들었다.
전시를 돌아보던 중 사람의 발길이 드문 별도의 작은 전시실이 있어 들어가 보았다. 약 100년 정도 된 근대 일본의 남성들이 입던 기모노를 위한 전시실이었다.
위 사진 속 소년용 기모노는 처음으로 일본에서 유럽까지 비행했던 사건을 기념한다. 카미카제라는 비행기는 1937년 4월 9일 일본 도쿄에서 영국 런던까지 날아갔다. 일본의 후지산, 영국의 런던 타워 브리지, 여행의 경로 등 이미지가 장식되었다. 반대로 프린트되어 글자도 거꾸로, 프랑스 국기도 거꾸로 그려졌다는 게 재미있는 포인트다.
20세기 초, 이미 대부분의 일본 남자들은 서양식 의복을 주로 입었지만, 일부 기모노를 착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은은하고 차분한 색상과 패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놀라운 그림들이 수놓아져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일본의 진보를 상징하는 비행기와 줄지어 선 고층 빌딩은 당시에 일본 남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안감 패턴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모노의 패턴을 ‘오모시로가라(面白柄)’라고 한다. 비행기, 철도, 전함 등 기모노에서조차 제국주의의 야망을 드러내는 데 서슴지 않았다.
케브랑리의 기모노 특별전시는 지난 5월 28일로 종료되었다. 마지막에 전시실을 퇴장하면서 이 전시가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의 순회 전시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다음은 어디로 가볼까. 한국말을 하는 친절한 직원이 꼭 찾아보라던 한국 전시로 가야겠다. 한국 전시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지리적인 입지를 고증하듯 한국 전시는 중국과 일본의 거대한 전시실 사이에 놓여 있었다. 한 칸짜리 유리장 속에는 단출하고 당혹스러운 전시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입는 저고리 둘, 여성용 한복 한 벌, 그리고 보자기.
이게 전부였다! 얼마 전에 빅토리아 앨버트 뮤지엄에서 한류 특별전시를 보고 온 이후라 더욱 간극이 크게 느껴졌다. 이렇게 소박한 전시라니, 지리적인 입지만이 아니라 문화적인 영향력까지 철저히 고증했나 보다. 물론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박물관에 한국관을 둔다는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특히 케브랑리처럼 별칭 '원시예술 전시관'인 박물관에는 한국 전시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그렇지만 이왕이면, 타자를 이해한다며 만든 다문화 박물관에서 한국 전시가 이토록 초라한 건 한탄할 부분이기도 하다.
일본의 기모노는 네덜란드 상인이 동인도회사를 중심으로 활약하던 17세기말부터 유럽에 소개되어 1850년대 이후 인기를 끌었다. 그에 비해 한국의 문화는 대중문화를 시작으로 유럽 사회에서 이제야 주목받기 시작했다. 앞으로 언젠가는 상설전시 속 한복이나 보자기를 주제로 특별전시를 마련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케브랑리에서도 한류 전시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만큼 프랑스에는 한국에 관심을 가진 젊은이가 늘어간다. 하지만 기나긴 연구, 수집과정과 검증을 거쳐 문화의 관심도나 트렌드가 가장 늦게 반영되는 박물관이라는 공간에서는 아직 갈길이 멀었다.
[프랑스 파리의 케브랑리 박물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