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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레지구의 호텔과 오뗄

프랑스 파리의 카르나발레 뮤지엄

# 마레지구와 진격의 거인


어느 날, 동생이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나는 머글이야,라고. 갑자기 해리포터 세계관에 심취한 것인지. 머글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은 것 자체가 정말 머글스럽지 않았지만. 아무튼 웹툰회사에 다니는 동생은 동료 대부분이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를 사용해서 소외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머글의 상대 개념은 아마도 오타쿠인 것 같았다. 평소에 만화도 보지 않으면서 만화 만드는 일을 하는 너도 참 대단하다, 그럴 거면 내가 대신 가서 일할까? 농담하니 동생이 웃었다. 하하, 너도 머글이거든? 

    

그럼 나는 오타쿠가 되고 싶은 만화 애호가쯤 되려나. 피규어를 사 모으거나, 코스프레를 하거나, 비주류 작품까지 줄줄이 꾀지는 못해도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동생네 웹툰회사에 쏟아부은 돈도 얼마나 되는지…. 가끔은 내가 매출 많이 올려줬다고 자랑스레 말하기도 했다. 동생은 돈 아깝다며 말린다. 그렇지만 만화에 쏟아붓는 돈은 아깝지 않다. 나의 작은 서재는 만화책으로 꽉꽉 채워졌다. 언젠가 만화 박물관이나 애니메이션 성지순례로 여행에세이 책을 내고 싶은 작은 꿈도 키운다.  

   

그래서일까. 프랑스 파리의 마레지구를 처음 들었을 때, 이사야마 하지메의 만화 <진격의 거인>을 떠올리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 하며 이 글에 고백해 본다. 작품 속 ‘마레(mare)’라는 국가는 이야기 전개상 존재 자체가 엄청난 반전이다. 높은 벽에 둘러싸여 평화로운 일상을 사는 사람들은 벽 바깥의 인류가 모두 거인에게 멸망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들은 우물 안의 개구리일 뿐이었고, 바다 너머에는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커다란 세계가 존재했다. 그 중심에는 마레가 있었다. 여기서 작가는 바다라는 의미를 담은 라틴어를 국가의 이름으로 사용했다는 설이 있다.   

  

프랑스 보르도생장역에는 만화 <진격의 거인>을 앞세워 만화 페스티벌을 홍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물론 프랑스 파리의 마레지구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늪지대라는 뜻의 ‘마레(marais)’다. 파리의 3구와 4구를 합친 마레지구는 옛날에 지대가 낮아 센강이 자주 범람했다. 그래서 목축이나 경작으로나 사용하던 땅이었다. 13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수도원과 귀족의 별장, 저택 등이 들어서면서 점차 도시의 형태를 가졌다. 14세기에는 파리 시청사가 생기고, 백년전쟁으로 인해 바스티유 요새를 건설하면서 파리 안에서도 더욱 중요한 위치를 점했다. 그렇다, 마레지구에는 바스티유가 있다! 1789년 프랑스혁명 때, 파리 시민들은 감옥으로 개조된 바스티유로 행진했고, 그로 인해 혁명의 상징이 된 장소다.  

   

마레지구는 파리의 옛 모습을 잘 간직한 동네이기도 하다. 오스망 남작의 파리 개조사업으로 시내가 뒤엎어질 때, 가장 영향을 덜 받기도 했고, 1960년대에는 문화부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가 마레지구를 역사지구로서 보존하려고 애썼다. 그래서 지금도 니콜라 플라멜의 저택, 빅토르 위고의 저택, 지금은 피카소 미술관으로 운영 중인 살레 저택 등 오래된 건축물들이 남아있고, 구불구불하고 좁은 골목길이 살아있기도 하다.



# 오뗄 카르나발레와 호텔 목시 바스티유


마레지구를 대표하는 오래된 건축물 중에는 카르나발레 저택도 있다. 프랑스어로는 ‘오뗄 까르나발레(Hôtel Carnavalet)’라고 부르는, 현재의 카르나발레 뮤지엄이다. 이 건물은 1560년에 지어졌으니 거의 5백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오뗄(hôtel)’은 영어에 익숙한 한국인들에게 숙박업소인가 착각을 일으킬 법도 하지만, 도심 안에 있는 커다란 저택을 의미한다. 그래서 전원이나 영지의 저택을 말하는 샤또나 마누아르와 다르다. 


카르나발레 뮤지엄 내부에서 바라본 중정의 풍경. 저택의 고즈넉함과 위용이 동시에 느껴진다.


그렇다면 카르나발레 저택은 누가 소유했을까? 원래는 파리 의회의 의회장 자크 드 리뉴리(Jacques des Ligneris)라는 인물이 지은 건물이었다. 그는 루브르 궁전의 정사각형 중정을 작업했던 유명한 건축가 피에르 레스코(Pierre Lescot)에게 의뢰해서 가장 최신 양식으로 건물을 올리고, 화려한 조각으로 저택을 장식했다. 그러다 1578년,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Bretagne) 출신의 한 미망인이 저택을 갖게 되면서 ‘오뗄 까르나발레’라는 이름이 붙었다. 브르타뉴식 이름인 ‘케르느브누아’를 프랑스어식으로 표현하면 ‘까르나발레’였던 것이다. 왜 처음 건물을 지은 집주인의 이름이 붙지 않았는지, 집주인이 바뀌어도 저택의 이름은 그대로 남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후에도 카르나발레 저택은 많은 주인을 거쳐 갔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서간문 작가로 이름을 날린 세비녜 부인이다. 그녀는 1677년부터 1694년까지, 여생의 마지막을 이 저택에서 보냈다. 이미 100년이 된 건물이지만 꾸준히 보수작업을 거쳐 저택의 위용은 그대로 유지했을 터다. 고작 스물넷의 나이로 젊은 과부가 된 세비녜 부인은 사랑하는 딸이 먼 시골로 시집을 가게 되자 무료함을 달래주려고 편지를 부쳤다. 편지 속에는 베르사유 궁정과 파리 사교계의 소식들, 자연과 책의 감상, 인생에 대한 성찰 등이 담겼다.

     

그러다 결국 저택은 한 개인의 소유가 아닌, 나라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나폴레옹 3세의 명령으로 오스망 남작의 파리개조사업이 시행되던 1866년, 저택 건물은 파리시에 인수되었다. 그리고 1880년 파리 도시의 역사박물관 및 도서관으로 대중에게 개방되었다. 카르나발레 저택에는 오래된 파리의 유물과 고서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지금도 오뗄 카르나발레는 옛 파리의 모습을 볼 수 있어 많은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마레지구의 명소다.

     

마레지구는 내가 숙소를 잡은 장소이기도 했다. 리츠 호텔이나 르 브리스톨과 같은 특급 호텔에서 묵으면 훨씬 좋았겠지만, 뚜벅이 여행자의 소박한 선택은 목시 파리 바스티유 호텔. 오뗄 카르나발레까지 걸어서 불과 10분 거리에 있는 신식 3성급 호텔이다. 호텔가격이 치솟은 올해, 그나마 합리적인 가격에 도심에 머무를 수 있고, 건물상태가 좋은 편이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을 꼽는다면 마레지구와는 어울리지 않는, 완전히 미국식 호텔이라는 것 정도.    

 


목시 호텔은 한국에도 인사동과 명동 등 몇 군데 들어와 있는, 메리어트 계열의 경제적인 호텔이다. 핫핑크 색상을 시그니처로, 파티 피플을 불러 모을 법한 힙한 내부 인테리어가 독보적이다. 그래서 그런지 오래된 저택이 늘어선 마레지구에서 눈에 띄게 통통 튀고 발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호텔에 머물면서는 약간 불편한 점이 생길지도 모른다. 방도 작고, 엘리베이터도 좁고, 방 안의 테이블은 얼마나 귀여운지 1인용 테이블로 사용하기에도 조그맣다.  방 안에는 냉장고도 없고, 전기 포트도 없다. 혹시라도 굶을까 봐 챙겨간 컵라면이라도 끓여 먹으려면 텀블러를 가지고 프런트로 내려가야 한다. 프런트 직원은 뜨거운 물을 텀블러에 꽉 채워준다.

     

인터내셔널 호텔이라는 게 그렇다. 어느 나라나 도시에 가도 같은 브랜드 호텔에 가면 비슷한 경험과 서비스를 제공한다. 방 안에 있는 동안엔 이곳이 인사동인지, 교토인지, 마레지구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골목으로 들어가 한 블록만 걸어도 금방 16세기 파리의 길거리로 빨려 들어간다.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처럼 나도 느끼지 못한 사이 시간 이동을 해버린다.



# 박물관의 간판이 된 간판 회랑


카르나발레 뮤지엄은 파리 도시의 역사박물관답게 선사시대부터 20세기까지 파리가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했는지 보여준다. 그렇다면 가장 보편적인 전시 방식인 연대별 전시를 활용했을 것 같지만, 의외로 박물관의 첫 시작은 ‘간판 회랑’이다. 이곳은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파리 길거리 속 다양한 간판과 표지판을 전시한다. 크고 작은 형형색색 간판들은 왁자지껄한 파리의 평범한 일상으로 관람객을 끌어들인다.    


간판을 하나씩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파리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 같다.


간판회랑 중 일부 전시관의 모습
<미식가(Au Gourmand)> 간판


노부부 관람객이 유심히 보는 간판을 한번 같이 보자. 간판이라기에는 좀 이상하다. 한 남자가 홀로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모습이다. 구부정하게 앉은 남자는 두 다리를 자유분방하게 뻗고 동그랗게 뜬 두 눈으로 음식을 보면서 웃음을 짓는다. 이런 간판을 내건 가게는 역시 맛집이었을까? 사실 이 남자는 19세기 초반 그 시절의 인플루언서라고 볼 수 있다. 요리 비평가로서 음식을 먹고 평가하는 게 그의 직업이었다. 유명한 미식가의 얼굴을 간판에 그려 넣으면 손님이 더욱 모여들었던 걸까?  


<그리핀(Au Griffon)> 간판

   

다음은 ‘그리핀’이라는 이름을 가진 간판이다. 그리핀은 사자의 몸과 독수리의 머리와 날개를 가진 상상 속 동물이다. 해리포터 속 그리핀도르 기숙사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럼 기숙사 건물이라는 뜻인가? 아니면 마법사 지팡이 가게라도 되는 걸까? 엉뚱하게도 이 간판은 가구 가게를 나타낸다. 이 간판을 내걸었던 18세기 파리에서도 장식이 많고 화려한 가구가 인기 있었다. 그리고 그리핀을 조각한 간판은 가구 장인의 섬세하고 유려한 솜씨를 미리 보여주는 효과가 있다.     


<노르만의 황소(Au bœuf normand)> 간판


재미있으니까 하나만 더 보자.

얼룩이 있는 황소를 떡하니 그려놓은 간판이 있다. 소고기를 파는 정육점일까? 아니면 레스토랑? 사실, 이 가게는 황소와 별로 상관이 없다. 프랑스 사람들이 오다가다 묵는 여관이고, 그저 이름이 ‘노르망디 황소 여관’이었다. 뚜벅이 여행자나 말을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모두 묵을 수 있는 숙박업소였다. 이 여관은 왜 굳이 황소의 이미지를 가져다 썼을까? 여관 주인이 노르망디에서 목축업을 하던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간판이 사용되던 19세기 초까지도 파리 시내에는 길거리의 이름과 번지 주소가 없었다. 그래서 길을 찾기 어려운 여행자들에게 이런 눈에 띄는 간판은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간판회랑은 이외에도 다양한 간판이 있다.

  

나는 간판 회랑을 지나 선사시대 유적과 16세기, 17세기 전시관 등 모두 돌아보았다. 꼼꼼히 보지 않더라도 걸어 다니는 데만 한나절이 걸렸다. 정말 거대하고 대단한 박물관이다. 하루 만에 박물관을 다 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어떤 꼬마 여자아이가 자꾸 엄마를 두고 나를 따라다녀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어떤 유물을 요리조리 살펴보면, 아이도 따라 했다. 갑자기 관람 노선을 틀어 거꾸로 돌아가도 또다시 따라왔다. 그때는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아이 엄마는 내가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지 그저 내버려 둔 채 거리를 두고 쫓아왔다. 그래서 더 피곤해졌는지도 모른다.     


전시관을 다 돌아본 후에 강렬하게 남은 기억은 역시 첫인상, 간판 회랑이었다. 카르나발레 뮤지엄은 왜 하필이면, 간판 회랑으로 시작하는 걸까? 20세기까지 파리의 역사 속에는 주목할 만한, 그리고 찬란하게 빛나는 역사의 순간들이 많다. 프랑스혁명, 나폴레옹 시대, 벨에포크 등…, 관람객에게 자랑할 만한 문화유산과 증거들이 산처럼 쌓였을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람객을 가장 처음 맞이하는 건 민속 유물인 가게 간판들이다. 간판은 어떤 위대한 지도자나 사건이 아니라, 평범한 파리 시민들의 일상을 궁금하게 만든다. 카르나발레 뮤지엄의 큐레이터는 간판이야말로 파리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심지어 간판 회랑으로 시작하는 건 전시관의 전통적인 전개를 탈피하는 효과를 가진다. 단언컨대 전시관 중 간판 회랑이 가장 흥미롭다. 레스토랑, 안경점, 이발소, 약국, 교회, 염색가게 등 파리의 길거리가 얼마나 활기차고 번화했는지 엿볼 수 있는 장소다. 광고효과와 호객을 위해서 파리 사람들이 어떻게 머리를 굴렸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프랑스 시골마을을 걷다가 만난 간판

 

지금도 길을 걷다 보면 가끔 옛날식 간판을 만날 수 있다. 이것은 무슨 가게의 간판일까? 말 그림이니까 마구간? 너무 뻔하게 속단할 수 없는 노릇이다. 카르나발레 뮤지엄에서 만난 간판이 그랬듯이!



[프랑스 파리의 카르나발레 뮤지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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