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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엄샵 굿즈의 세계에 풍덩 빠져버린 날

프랑스 지베르니 모네의 정원

파리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는 근교 여행지 중에 지베르니(Giverny)는 가장 인기 있는 장소 중 하나다. 알파벳을 영어식으로 읽으면 ‘지베르니’지만, 프랑스에선 발음이 ‘쥐베흐니’에 가깝다. 파리에서 서북쪽으로 약 80km 떨어진 노르망디 외르주에 위치한 작은 마을은 인구도 고작 500여 명 정도다. 인적이 드문 시골길에는 이따금 많은 사람을 실어 나르는 버스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기차역과 대형 주차장 사이를 오갈 뿐이다. 아무렴, 이곳은 한 해 무려 약 40만 명의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는 알짜배기 관광지이다.

     

한낱 시골 동네일 수 있는 지베르니를 유명한 관광지로 만든 공은 모두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에게 있다. 이곳은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모네가 쉰셋이던 189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약 30년간 살았던 생가와 정원이 있다. 그의 그림은 현대에도 사랑받고, 그가 거닐고 가꾸고 그렸던 정원은 화가가 아닌 이들에게도 감명을 준다. 그래서 겨울 시즌을 제외하고 문을 활짝 열어놓은 모네의 집과 정원은 언제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지베르니까지 자동차를 빌려 가는 방법도 있겠으나 오늘도 뚜벅이는 기차역으로 향한다. 파리 생라자르역(Saint-Lazare)에서 베르농-지베르니(Vernon–Giverny)까지 가는 기차표는 예매해 두었다. 한국의 KTX를 생각하면 기차표는 미리미리 구해두는 편이 안전하다. 그런데 프랑스국유철도 SNCF는 파업으로 마음고생을 시키더니 앱도 먹통이다. 자꾸 존재하지 않는 회원이라며 로그인이 튕겨 나오거나, 어찌어찌 접속을 해도 예약 내역이 나오지 않는다.   

   

하필이면 티켓 검사를 하는 역무원 앞에서도 말을 듣지 않는다. 이럴 줄 알고 미리 인쇄를 해왔지! 하며 꺼낸 예약 확인서를 보여주어도 역무원은 고개를 절레절레할 뿐이다. 말도 통하지 않는다. 이내 역무원은 나를 포기해 버렸다. 그가 자리를 뜬 후에야 예약 내역이 QR코드로 짠, 하고 나타났다. 결백을 증명하고픈 간절한 마음으로 그가 다시 확인하러 오길 기다렸지만, 어느새 열차는 베르농-지베르니 역에 도착했다.   

  

파리 생라자르역에서 지베르니까지는 기차로 단 50분이다. 이 정도면 파리까지 출퇴근도 가능한 거리겠다. 지방에서야 1시간 거리면 엄청나게 느껴지지만, 수도권에서는 출퇴근 가능 여부 기준이 1시간 반이라는 흥미로운 이야기. 지베르니 모네의 집까지는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20분 정도 달려야 하니 1시간 반 이내가 된다. 그래서 한국인도 많이 찾는 근교 여행지가 된 것인가. 얼마나 다행인가….     

 

자동차를 빌렸더라면 좀 더 기차역 근처를 천천히 둘러볼 수도 있겠지만, 뚜벅이는 정해진 버스 시간에 맞춰 자리를 일어나야 한다. 편의점도 들를 새 없이 바로 버스표를 구매해 착석했다. 모네의 집까지 데려다줄 셔틀버스는 타이어 바퀴로 굴러가지만, 모양은 작은 모노레일이나 협궤열차처럼 귀엽다. 트레일러처럼 줄줄이 딸린 네모난 칸을 견인하며 도로를 느긋하게 달린다. 거리에 나와 엄마와 걷던 아이들이 때마침 손을 흔들어 준다. 별것 아닌 손짓에도 마음이 느슨해진다.



# 초봄의 지베르니, 햇볕에 물드는 모네의 집     


모네의 정원을 돌아보는 관람객의 시선에는 필터가 하나씩 끼워지는 듯하다. 선명하게 빛나는 눈앞의 장면은 아련하고 세세한 파편들로 쪼개진다. 연못, 대나무, 초록색 일본 다리를 드리우는 보라색 등나무, 이름 모를 작은 풀과 꽃들. 그 너머로 그의 그림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네의 작품은 모네의 집에 있지 않다. 이곳에서는 그의 발자국과 고스란히 남은 취향을 함께 즐길 뿐이다. 정원 사이에는 오솔길처럼 좁은 길이 나 있다. 벤치에 앉으려니 순간 차가운 바람이 확 불어와 아직 마음 놓을 때가 아니라는 걸 알려준다.

    

4월의 초봄이다. 모네의 정원은 개장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누군가는 겨우내 입은 양털 파카를 꺼내고 몸에 열이 많은 누군가는 얇은 스웨터 한 장으로 족하다. 아직 날씨가 이렇게 혼란스러운데 정원에 꽃이 피었을까 미리 걱정하기도 한 터였다. 꽃도 성급한지 벌써 꽃이파리를 열었다가 살짝 얼어붙기도 한다. 한 번 내민 얼굴은 다시 무르기도 어려운데.   


모네의 집 근처에서 살짝 벗어난 지베르니 마을 풍경이다.
지베르니의 한 레스토랑에서 헐벗은 나무가 때 이른 봄인 것을 알려준다.
모네의 정원 중 릴리 연못(Lily pond). 아직 연꽃이 피어날 시기는 아니다.


정원을 둘러본 후, 모네의 집으로 들어갔다. 화실을 제외하고 모네의 그림을 찾을 수는 없다. 화실에서도 그의 작품 원본들은 이곳에 없고,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다는 걸 팸플릿을 통해 알려줄 뿐이었다. 돌아다니면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인테리어와는 한껏 이질적인 그림들이다. 모네는 열성적인 일본화 수집가였다. 호쿠사이와 히로시게 등의 우키요에를 엄청난 규모로 수집했던 모네는 직접 네덜란드 잔담까지 찾아가 일본화를 구입하기도 했다. 놀랍게도 벽에 걸린 일본화 역시 복제품이다.   

  

2층으로 올라가면 모네와 가족들의 침실 공간이 있다. 출입이 막혀 관람객에게 공개되지 않은 곳은 창고와 관리인의 방이다. 아마도 모네는 1층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화실, 살롱, 부엌과 식사를 하던 다이닝 공간이 모두 1층에 있다. 각각의 공간이 다 예쁘지만 다이닝룸이 특히 발을 붙잡아 떠나기 어려웠다. 가구와 벽지 모두 노랗게 칠한 다이닝룸은 햇볕이 없는 시간에도 이미 물들어버린 것 같았다.   


모네의 화실
에피세리(Epicerie)의 바닥 카펫
다이닝룸은 가족끼리 식사도 하고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모네의 식탁에는 아스파라거스, 구운 오리고기 요리, 꿩고기, 오일과 페퍼로 시즈닝 한 샐러드가 올랐다. 모네는 가끔 다이닝룸의 창문을 열어 찾아오는 새에게 먹이를 주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좋아하는 음식 중에 새고기가 많은 게 재미있다. 찬장 속에는 중국 도자기들이, 벽에는 섬세한 일본의 그림들이 빼곡하다. 장식용 탁자 위에는 털이 없어 스핑크스로 보이는 고양이가 잠들어 있다. 그의 만찬에 초대받은 손님들 중에는 일본인도 있었을 것이다. 기모노를 차려입고 노란색 다이닝룸에서 모네와 함께 새로 들여온 좋은 그림 하나 있다고 넌지시 떠보았을지도 모른다.



# 나만의 공간을 위한 작은 전시품     


작년에 MBC에서 <도포자락 휘날리며>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한류 전도사들이 북유럽 덴마크로 떠나 한국의 전통문화를 알리는 여행 버라이어티쇼였다. 비록 큰 화제는 되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박물관 종사자로서는 참 흥미로운 프로그램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 뮤지엄 샵에서 만날 수 있는 상품을 연예인들이 덴마크 한복판에서 판매를 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덴마크 사람들은 낯선 물건에 호기심을 보이고, 출연자들은 세일즈와 매출에 열을 올렸다.      


국립중앙박물관이야 상품의 개발과 마케팅을 재단 측에 일임하겠지만, 내가 근무했던 작은 박물관에서는 이것 역시 학예사의 몫이다. 소비자가 어떤 상품을 찾고, 어떤 가격대에 흠칫 놀라는지, 아니면 기꺼이 지갑을 열며 ‘싸다!’를 연발하는지 모두 모니터링의 대상이다. 입장료 수익보다 상품 판매로 이번 달 매출이 좋으면 괜히 어깨도 으쓱해진다.   

  

나는 뮤지엄 샵을 사랑한다. 박물관을 들르는 건 8할 기념품을 사는 재미 때문이다. 뮤지엄 샵에 놓여 있는 것은 그냥 일반적인 상품이 아니다. 박물관을 기억하는 기념품, 아니면 여행수집가의 컬렉션 그리고 나의 공간 속 어딘가를 전시장으로 만들어 추억으로 물들일 전시품이다.      


모네의 집에서 나와 왼쪽으로 접어들어 닭장을 지나면 기념품 샵이 있다. 들어가자마자 탄성을 쏟아냈다. 와아! 이 정도는 되어야 쇼핑할 맛이 난다. 포스트 카드, 노트, 연필, 책갈피 등과 같은 기본적인 기념품부터 우산, 액세서리, 미니어처, 서적류, 심지어 씨앗까지 팔고 있다.     

 

모네의 정원 기념품샵(1) - 엽서, 포스터
모네의 정원 기념품샵(2) - 가이드북
모네의 정원 기념품샵(3) - 어린이용 도서도 많이 구비되었다.
모네의 정원 기념품샵(4) - 모네의 주방 미니어처
모네의 정원 기념품샵(5) - 모네의 팔레트


마음에 쏙 들었던 건 모네의 팔레트를 본 따 만든 마그넷이다. 뒷면에 부착할 수 있는 자석이 아주 약해서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물감과 붓이 후드득 떨어져 버릴 위험이 있다.  


역시 노르망디는 칼바도스

    

클로드 모네와 직접적인 상관은 없지만, 지베르니에서 생산하는 지역 특산물도 판매한다. 모네의 정원 재단은 지역 경제를 부흥시키고 활성화하는 선두 주자로서 책임감이 막중함에 틀림없었다.     


무엇을 살까 고민될 때는 척척박사님 노래를 꺼낸다. 코카콜라 맛있다. 맛있으면 또 먹어. 또 먹으면 배탈 나…. 알아맞혀 보세요. 결국 나는 양손 가득히 기념품을 챙겨 나왔다. 그런데도 무언가 허전하고 아쉬워 뒤를 돌아보았다. 집에 커다란 장식장만 있었더라면 노란 다이닝룸 미니어처는 샀을지도 모른다. 그래, 다음에 돈을 더 많이 벌고 다시 와서 사면되지. 항상 자신을 설득하는 레퍼토리는 똑같다.



# 텁텁한 맛 나는 오랑주리 미술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오랑주리로 향했다. 지베르니에서 뺑 오 쇼콜라 하나로 점심을 때웠더니 배가 고팠지만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왠지 모네의 작품을 꼭 보고 싶었다.


오랑주리 미술관은 모네의 수련 연작이 전시된 곳으로 아주 유명하다. 아니나 다를까, 미술관 앞으로는 어마어마한 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네도 대단하고, 서늘한 날씨에 바깥에서 기다리는 사람들도 대단하다. 얌체 같아 보일 수 있지만 ICOM 카드를 보여주니 바로 입장할 수 있었다. 사전 예매나 대기가 필요 없는 막강한 카드다.  

    

오랑주리 미술관은 한적하고 여유로운 미술관의 모습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고 정신이 없다. 조용히 감상해야 할 작품 앞에서는 사람들이 이야기 나누는 소리와 카메라 앞에 포즈를 취하는 어수선함이 더해졌다. 프랑스의 뮤지엄은 어쩔 수 없다.     


오랑주리 미술관 앞에는 대기줄이 어마어마하다.
오랑주리 미술관이 소장한 모네의 수련 연작


배가 고파서 작품 감상은 잠시 미루고 카페테리아를 찾았다. 앞서 주문하는 사람과 점원이 서로 의사소통이 잘되지 않는 모습을 보고 마음속으로 정했던 메뉴를 바꿨다. 주변이 시끄러운 데다가 영어도 통하지 않은 게 문제인 듯했다. 코카콜라! 앤드 이거요. 공기를 찢는 파열음과 함께 손가락으로 바로 앞에 있는 빵을 가리켰다. 빠르고 효율적인 주문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퍽퍽한 빵과 코카콜라는 영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입안이 텁텁해졌다.      


자리에 앉아 콜라를 마시며 모네의 정원 기념품에서 사 온 도록을 꺼내 보았다. 역시 오랑주리보다는 여기가 더 좋았어. 모네의 작품은 없지만, 모네의 집을 찾는 이유가 충분하다.



[프랑스 지베르니 모네의 정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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