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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에 대한 짧은 일기 모음

프랑스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

# 뉴욕 맨해튼 5번가, 티파니 본점에서     


이른 아침 한산한 맨해튼 거리. 뉴욕을 상징하는 노란색 택시에서 아름다운 여자가 내렸다. 늘씬한 몸매가 드러나는 블랙 이브닝드레스와 우아한 진주 목걸이. 새벽까지 이어진 파티라도 다녀오는 길인 걸까? 그렇다기엔 그녀의 올림머리는 머리카락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고 정갈하다. 바쁜 촬영 일정에도 아침 식사는 거르지 않는 편이에요,라고 말할 것 같은 그녀는 따뜻한 커피와 빵을 손에 든 채 길을 걷는다. 발길이 향한 곳은 문도 열지 않은 티파니 매장의 쇼윈도. 캄캄한 창 너머로 반짝이는 건 샹들리에와 그녀의 눈빛이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유명한 오프닝 씬이다. 많은 관객을 매료시킨 영화 속 티파니 매장은 뉴욕 맨해튼 5번가에 위치한 본점이다. 지금도 영화 속 오드리 헵번을 떠올리며 티파니 매장을 찾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주얼리에 관심이 없더라도 5번가의 티파니 매장은 들러보면 좋다. 매장의 어마어마한 규모와 보유하고 있는 컬렉션은 이루 말할 것 없이 볼만하고, 혹시 기념품을 사고 싶다면 티파니에는 저렴한 실버 라인의 상품도 많다.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은 리턴 투 티파니가 대표적이다.   

  

뭘 살까? 지갑을 두둑하게 준비해 간 쇼핑에서는 즐거운 고민이 가득하다. 한국 매장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노보 호라이즌도 보석 종류와 사이즈 별로 다 갖췄다. 고민이 조금 길어질 것 같으니 응대하는 직원은 은근슬쩍 다 사라고 권한다. 자, 보세요. 보석은 여러 개를 걸칠수록 아름다운 법이죠…. 직원의 가느다란 손가락과 손목에는 어느새 주얼리가 주렁주렁 달렸다. 흠, 그런 말에 홀라당 넘어갈 순 없다.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리고 기분 좋게 돌아 나왔다. 지갑은 홀쭉해졌다. 그래도 이대론 뭔가 아쉬운데. 매장을 한 번 더 찬찬히 둘러보다가 멈춰 섰다. 귀여운 올리브나무 잎사귀 모양을 한 은귀걸이가 눈에 띄었다. 디자이너의 이름은 팔로마 피카소. 1980년대부터 티파니에서 활약한 보석 디자이너다. 모로코에 있는 집 근처에 올리브나무 숲이 있는데 그곳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름이 피카소? 혹시 전 세계인이 다 아는 파블로 피카소와 어떤 관계라도 있는 걸까? 찾아보니까 그의 막내딸이란다.



# 파리 마레지구, 살레 저택에서     


갑자기 뉴욕의 티파니 본점에서 피카소의 막내딸을 알게 된 옛날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곳, 파리 마레지구의 한 미술관에 있다. 바로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 이곳은 피카소가 사망한 이후, 그의 가족들이 낸 상속세의 기여도가 큰 미술관이다. 본래 세금은 현금으로 내야 하지만, 프랑스 정부는 유족에게 대물변제 제도를 통해 피카소의 작품으로 상속세를 대신하도록 했다. 1968년부터 예술작품이나 역사적 의미가 큰 수집품 등으로 대신 납부하게 함으로써 국가의 문화적 자산을 풍요롭게 할 목적으로 만든 제도다.

     

그렇게 확보한 작품을 포함하여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은 3천여 점이 넘는 피카소의 작품들과 그가 수집한 세잔, 마티스, 모딜리아니 등을 소장하게 되었다. 또 한 차례, 최근 2021년에도 <돈 호세 루이스>, <의자 아래 막대사탕을 들고 있는 아이> 등 작품 9점이 추가되었다. 네 명의 자녀와 손주까지 포함한 유족들의 상속분을 납부한 것이다.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유족들도 사망하게 되어 다시 상속세가 발생할 텐데, 그때는 어떤 피카소의 작품들이 미술관의 수장고로 안착하게 될까.  

   

‘피카소 미술관’은 굉장히 많다. 명성이 높은 파리와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미술관 이외에도 피카소가 태어난 집을 개조해서 만든 말라가의 피카소 미술관, 피카소가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낸 앙티브의 피카소 미술관, 피카소와 친분이 있던 로젠카르트가 작품을 기증해 만든 루체른의 피카소 미술관 등…. 같은 화가의 이름이 붙은 미술관이 이렇게나 많은 사례가 또 있을까. 피카소가 만들어낸 예술적 영향력의 힘이기도 하고, 작품의 수가 워낙 많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중에서도 대표작을 가장 많이 소장한 곳이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이다. 건물도 중요문화재로 등록되었는지 정문 앞에 안내판이 세워졌다. 17세기 중반에 지어진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저택은 원래 소금에 대한 세금을 걷던 피에르 오베르가 살던 집이었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소금 저택(프랑스어로 오뗄 살레 Hotel Salé)’이다. 피카소도 소금 저택에서 얼마간 살았던 것 같다. 그는 오래된 저택을 살롱으로 삼고 작업하는 걸 즐겼다. 그리고 1985년, 소금 저택은 피카소 미술관으로 개조되었다. 여러 가지로 세금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미술관이다.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이 좋은 점은 피카소의 예술세계를 시대와 특징별로 구분해 전시했다는 것이다. 초기부터 말기까지 다양한 작품을 소장한 미술관이니까 할 수 있는 전시다. 빨간 방, 노란 방, 파란 방, 줄무늬 방, 피에로 방…. 다채로운 전시실을 하나씩 지나면서 어느 곳 하나 사람이 북적이지 않는 곳이 없다. 피카소는 빠르게 변하는 시대를 기민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 안주하지 않던 화가다.


변화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그러나 변하면 또한 추락한다.


지난달 타계한 한국의 화가 박서보의 말이다. 생전 모습과 인터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줄무늬 셔츠를 입고 작업에 몰두하는 그를 보니 피카소가 떠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피카소는 변화무쌍함 그 자체였다.


피카소가 <보그> 잡지에 그린 낙서 전시
어릿광대 분장을 한 파울로 피카소(1924년작)



# 마드리드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 205.10번 방에서


피카소는 스페인 말라가에서 태어났지만, 사망한 곳은 프랑스 남부지역의 무쟝이란 동네다. 태어난 장소는 스스로 선택할 수 없지만 살아가고 죽을 곳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한다. 그걸 감안한다면, 피카소의 인생에서 프랑스는 아주 중요한 나라였다. 그는 성인이 될 무렵에 처음 파리로 건너가 기욤 아폴리네르, 조르쥬 브라크 등과 교류하며 프랑스의 화풍을 만나고 그곳에서 인정도 받았다. 위에서 언급했듯 파리의 소금 저택도 대단한 피카소 미술관이지만, 마지막 안식처로 삼은 무쟝 근처 해안가 앙티브의 그리말디성에도 미술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카소는 프랑스의 피카소 미술관들로 충분하지 않다. ‘피카소 미술관’은 아니지만, 그의 대표작을 만날 수 있는 미술관은 두 군데 더 꼽아야 한다. <아비뇽의 여인들>을 소장한 뉴욕 현대미술관과 <게르니카>의 마드리드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다. 피카소 작품의 순례길을 만든다면 태평양이든 대서양이든 여하튼 아주 먼 길을 건너 다녀야 하니 고되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는 뚜벅이 여행자를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광활한 미술관은 중정을 두고 건물들이 둘러싼 모양인데, 각 층의 복도가 넓고 방이 많았다. 흡사 옛날 병원이나 학교와 비슷했다. 0층부터 차근차근 둘러보면 언젠가 <게르니카>를 마주치겠거니 생각한 건 완전히 오산이었다. 자꾸 같은 장소를 맴돌게 되거나, 벗어나고 싶어서 엘리베이터를 타면 갑자기 바깥에 나오게 되었다. 아니다. 정정해야겠다. 뚜벅이라서가 아니라, 방향치인 것이 문제다. 결국 나는 안내원에게 말을 걸어 <게르니카> 전시실은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찾은 전시실. 이곳엔 <게르니카>의 제작 과정을 카메라로 담은 도라 마르의 작품들도 함께 전시되었다. 그녀는 <도라 마르의 초상> 속 주인공이기도 하다.


<게르니카>를 전시한 205.10번 방


피카소의 위대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 <게르니카>는 스페인의 평화를 위해 바치는 제물이자 분노하는 목소리였다. 1937년 4월, 프랑코 군을 지원하는 독일 나치군의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한 작은 마을 게르니카에 살던 주민 2천여 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피카소는 파리의 국제박람회 스페인관에 출품할 대규모 작품을 의뢰받은 상황에서 6주 만에 <게르니카>를 그려냈다. 짓밟힌 사람, 아이를 잃고 절규하는 여자, 부러진 칼날…. 지금도 억압에 맞서는 상징적인 작품으로 남아있다.   

  

<게르니카>는 오랫동안 스페인에 돌아오지 못했다. 스페인은 프랑코 체제가 계속되는 상황이었고, 피카소는 독재자인 그를 증오했다. 1981년 프라도 미술관으로 돌아왔다가 현재는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로 옮겨졌다. 스페인이 자유를 찾으면 작품을 프라도에 기증해 달라는 피카소의 유지에 따른 것이었다. 작품은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갔지만, 스페인이 과거 문제를 잘 매듭짓고 앞으로 나아가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마드리드 북쪽의 전몰 용사 계곡의 대회당 묘역에 안장되었던 프랑코의 묘는 아주 최근인 2019년에나 파묘되었다.


언젠가 또 떠날 수 있다면 다음 여행지는 다시 뉴욕으로 정하면 어떨까. 맨해튼의 티파니 본점에 가더라도 은제품은 사지 않을 것이다. 팔로마 피카소의 올리브 리프 은귀걸이는 자주 변색되어 세척이 필요하고 보관이 까다롭다. 아니지, 그게 문제가 아니다. 쇼핑에 정신이 팔려 티파니 본점에서 불과 3개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아비뇽의 처녀들>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 않은가.



[프랑스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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