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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디에고 리베라를 보러 왔는데요

미국 샌프란시스코 미술학교(Art Institute)

샌프란시스코 미술학교(San Francisco Art Institute)가 파산했다. 모교도 아니고, 남의 학교가 파산해서 문을 닫게 생겼다는 소식이 무슨 상관이랴…, 할 수도 있지만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곳의 벽 한편에 디에고 리베라가 그림을 그려놓았다.


2023년 가을의 어느 날.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차가운 숨을 몰아쉬며 가파른 경사길을 올랐다. 택시를 타고 지나갈 때 진작 알아보았지만, 도저히 걸어서 다닐 길이 못 된다. 급경사에 구불구불한 도로로 유명한 롬바르드 스트리트의 바로 근처, 체스트넛 스트리트에는 스페인 식민시절 양식을 떠올리게 만드는 붉은 지붕의 건물이 있다. 1871년에 설립되어 지금까지 명문 예술학교로 명성을 유지해 왔던 샌프란시스코 미술학교다.


경사로에 넘어지지 않고 우뚝 서 있는 건물이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학교 정문으로 올라가는 길. 매일 다닌다면 매우 건강해질 것이다. 

  

폐교한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쉬움과 헛헛함을 달래려는 등산이었다. 어기적어기적 기어가듯 걸어 올라가는 길목에서는 그간 샌프란시스코의 미술학도들이 가졌을 고충을 생각해 보았다. 아니면 아무도 걸어 다니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인가? 셔틀버스가 있거나 전동킥보드를 타고 다녔을지도 모른다. 그저 뚜벅이가 최고인 줄 아는 나는 학창 시절에도 바보 소리를 들으며 지하철역에서 정문까지 30분간 산길을 걷는 고행을 했다.

     

굳게 닫힌 문, 캄캄한 창을 통해 느껴지는 적막한 내부, 아무도 살지 않는 듯 고요하기만 한 거리, 텅 빈 주차장. 아무래도 이 근방은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는 모양이었다. 산행을 함께 한 동행인은 원망스럽지도 않은지 다정하게 물었다. 여기에 보고 싶은 벽화가 있다고요? 학교가 문을 닫아서 어떡하죠. ―괜찮아요.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이 건물에 남아 있다는 것으로 위안이 돼요. 그러면서 나는 아마도 저런 높은 창 근처일 것 같은데…, 하며 벽화의 위치를 대충 눈으로 가늠해 보았다. 


디에고 리베라가 그린 샌프란시스코 미술학교의 벽화 (출처: Los Angeles Times)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라면 다른 미술관에서도 볼 수 있을 텐데, 나는 왜 샌프란시스코 미술학교를 와보고 싶었을까. 이곳의 매력은 무엇보다 일반적인 미술관이 아니라 그림이 학교에 있다는 점이 아닐까. 학교는 미술작품을 전시하는 전문 공간이 아니지만, 평범한 공간이 전시공간으로 바뀔 때 더욱 눈길이 가는 법이다. 미술학도들은 오며 가며 리베라의 그림을 흘끗 보고 지나갔을 것이다. 미술관에서 제대로 각을 잡고 작품을 감상하는 자세보다는, 공강 시간이나 잠깐 점심 먹으러 나와서, 친구와 수다를 떨며 지나가는 틈에 스치듯 마주쳤을 테다.

     

심지어 1930년대 초반의 학생이라면 디에고 리베라의 작업 현장을 직접 눈으로 봤을 것이다. 그가 그린 <도시건설을 보여주는 프레스코 제작>은 프레스코화를 그리는 행위 역시 건설업과 비슷한 노동이란 걸 몸소 보여줬겠지. 1931년에 완성된 이 작품은 나무로 된 비계 위에서 프레스코화를 작업하거나 건물을 짓는 사람들을 묘사했다. 프레스코를 그리는 사람을 그리는 디에고 리베라를 보면서 미술학도들은 자극을 받기도 하고, 나라면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고민해보기도 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청년이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앞을 지나다니며 그림을 그렸을까. 샌프란시스코 미술학교는 영향력 있는 미술가를 계속해서 배출해 왔다. 전후 미국 미술의 선두주자로 알려진 리처드 디벤콘(Richard Diebonkorn), LACMA에서 커다란 바위를 공중에 띄운 어스워크 예술가 마이클 하이저(Michael Heizer), 흑인 초상과 조각으로 이름을 알린 케힌데 와일리(Kehinde Wiley) 등이 모두 샌프란시스코 미술학교 출신이다. 

    

샌프란시스코 미술학교의 몰락은 코로나-19와 함께 찾아왔다. 신학기 학생을 받지 못하고, 학위과정을 운영 중단하고, 교수진에게 지급할 월급을 걱정하게 되었다.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라 이전부터 축적된 재정 문제가 폭발한 것일 테다. 학교는 정규과정 대신 스튜디오 미술수업이나 보조금을 지원받는 전시 프로젝트를 고려해야 하는 판국이었다. 문제는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였다. 이걸 팔면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 학교는 깊은 고민의 수렁 속에 빠져들었다.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는 약 5천만 달러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받는다. 작품의 매각이 현실화되려니 영화감독 조지 루카스나 샌프란시스코 현대 미술관이 구매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유명한 미술작품을 매매하는 행위는 늘 시끄러운 논란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샌프란시스코 시 공무원과 시민단체들은 작품이 샌프란시스코, 그리고 이 학교에 그대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매각될 위기에 처했다’, ‘보조금을 조달받아 그림도 보존하고 학교도 겨우 연명하게 되었다’, ‘역시 재정 악화로 폐교하겠다…’ 뉴스가 반복되다가 결국 끝을 맺었다. 2022년 7월, 학교는 영구히 문을 닫게 되었다.




+ 더하는 이야기

디에고 리베라로 대표되는 멕시코의 벽화운동은 고대 마야와 아즈텍 문명부터 그렸던 벽화의 전통을 이어나가며 멕시코 민족의 정신을 되살리자는 공적인 예술운동이었다. 멕시코 혁명을 통해 디에스 대통령의 독재체제를 타도하고 사회경제적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던 때였다. 문맹률이 높았던 20세기 초반, 벽화는 글 대신 효과적인 선전 도구였다. 비록 나중에는 예술을 정치적으로 오염시켰다는 일부의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남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로, 북아메리카로 뻗어 나갔고, 벽화는 계속해서 그려졌다.


작년에는 또 다른 벽화 문제가 샌프란시스코 뉴스를 장식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조지 워싱턴 고등학교에는 빅터 아르노토프의 <워싱턴의 삶>이라는 벽화가 여러 점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벽화를 철거해야 한다는 날 선 지적이 생기고 걷잡을 수 없이 불거지더니 공론화된 것이었다. 이 그림 속에서는 조지 워싱턴이 노예 소유주로 묘사되어 아메리카 원주민과 전투를 하고 그들을 학살하던 장면이 담겨 있다. 빅터 아르노토프는 디에고 리베라의 조수였다. 


샌프란시스코 조지 워싱턴 고등학교의 벽화 중 일부 (출처: The New York Times)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가운데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후손들이 있었다. 그들은 ‘나는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다’며 통탄하던 조부모 아래 자랐고, 원주민을 짓밟고 노예화하는 그림은 트라우마를 일으킨다고 소리쳤다. 또 누군가는 폭력적인 장면을 아이들에게 노출하는 것은 교육적인 차원에서도 좋지 못하다고 여겼다.

     

벽화는 글자가 아니라 그림이라서 그런 걸까. 빅터 아르노토프가 그림을 그렸을 당시에는 미국인이 영웅으로 칭송하는 조지 워싱턴의 어두운 면, 즉 원주민을 학살하고 노예로 삼았던 걸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그림을 그렸던 맥락은 어디 가고 벽화는 왜 사람들에게 그저 끔찍한 장면으로만 남게 된 것일까. 그래서 벽화를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불편한 역사더라도, 끔찍한 학살의 장면이라 하더라도, 사실로서의 역사는 감추지 말고 계속 이야기해 나가야 하므로. 

    

최근 들려오는 소식에 따르면, 자선단체와 몇몇 후원자들이 나서서 샌프란시스코 미술학교의 문을 열기 위해 노력한다고 한다. 물론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도 그대로 학교 한편에 유지하면서 말이다. 150년 전통을 가진 예술학교가 계속해서 그림과 함께 역사를 이어나간다면, 언젠가 다시 방문했을 땐 문을 활짝 열어줄지도 모른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샌프란시스코 미술학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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