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이타마 시립 만화회관
일본의 관동지방 중서부에 위치한 사이타마현(埼玉県)은 한국에 빗댄다면 경기도 고양, 부천과 비슷하다. 넓게 보면 도쿄 생활권에 속해 수많은 통근자가 두 지역을 오가는 열차에 몸을 싣는다. 그걸 계산하지 못하고 퇴근 시간에 사이타마현을 가기 위해 우에노도쿄라인에 올라탄 여행자는 그만 식겁하고 말았다. 우에노에서 사이타마현 최대 규모의 철도역인 오미야역까지 단 25분이지만, 일상생활에서 겪던 지옥철을 일본에서 마주하니 더욱 죽을 맛이다. 내가 왜 여기서도 이러고 있는 걸까…,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오미야역에서 다시 도부어반파크라인으로 갈아타 두 개 정거장을 지나면, 오미야코엔역(大宮公園駅)에 다다른다. 이곳에서 잠깐 걸으면 ‘만화회관’이라는 이름의 작은 건물이 있다.
오미야코엔역 뒤편 철도건널목 신호등에서 나는 잠시 열차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갑자기 문은 열었을까 걱정되어 구글맵을 다시 켰다. ‘영업 중’이란 표시가 떴지만 이것만으론 안심하지 못한다. 자동으로 켜지는 영업 사인 때문에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른 일이 많다. 추적추적 비가 오는데 멀리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걸 보고서야 마음을 놓는다. 이토록 작은 박물관이란 마음을 쉬이 놓을 수 없는 존재다.
곧 만화회관에 도착했다. ‘최초’ 타이틀이 여럿 붙은 박물관인 게 무색하게도 매우 한적한 모습이다. 조용한 주택가 속에 자리 잡은 박물관은 마치 초라한 행색을 한 채 웅크리고 앉은 노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이타마시립만화회관(さいたま市立漫画会館)’은 일본에 최초로 설립된 공공 만화박물관이면서 동시에 ‘최초의 만화가’라는 타이틀을 지닌 기타자와 라쿠텐(北沢楽天)이 주인공이다.
일본 내에 있는 많은 만화 전문 박물관은 ‘망가(Manga)’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망가’란 일본어로 ‘만화(漫画)’라는 말이다. 세계적인 수준의 만화산업을 자랑하는 일본이기에 ‘망가’라는 단어도 외국인의 입에 익숙하게 붙었다. 교토의 국제만화박물관, 기타큐슈의 만화박물관, 미야기현의 이시노모리 만화박물관 역시 ‘망가’라는 표현을 앞세운다.
3군데 박물관의 명칭을 한글, 일본어, 영어 순으로 정리해 보면 이렇다.
1) 교토국제만화박물관 京都国際マンガミュージアム Kyoto International Manga Museum
2) 기타큐슈만화박물관 北九州市漫画ミュージアム Kitakyushu Manga Museum
3) 이시노모리만화관 石ノ森萬画館 Ishinomori Manga Museum
그런데 이곳, 사이타마시립만화회관의 영문 표기는 ‘Saitama City Cartoon Art Museum’이다. ‘망가’ 대신 ‘카툰’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다.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기타자와 라쿠텐의 그림을 보면, 그가 일본인이라고 해서 ‘망가’라고 부르기엔 참 애매하다. 그는 신문지나 잡지에서 종종 주인공 역할을 하는 풍자만화를 그리는 만화가였다. 그림 기술과 화풍만 놓고 본다면 유럽이나 미국의 작품과 차이를 느끼기 어렵다. ‘카툰’은 주로 영어권 유럽에서 ‘만화’를 지칭하는 말이다. 미국에서는 ‘만화’를 ‘코믹’이라고 부른다. 한국에서는 만화, 망가, 카툰, 코믹 등 다양한 용어를 혼합해서 사용한다. 그림과 이야기가 있는 작품을 통틀어 만화라고 부르지만 일본 작품은 망가, 미국 작품은 코믹, 그리고 네 칸짜리 시사만화는 보통 카툰이라고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기타자와 라쿠텐은 일본 만화계의 시초라고 불릴 수 있는 걸까? 박물관은 물론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가 막 활약하기 시작한 메이지 시대에는 아직 ‘만화가’라는 단어조차 없었다. 일본에서 ‘만화가’는 다이쇼 시대 이후부터 일반적인 직업이 된다. 그러던 시절, 그는 네 컷 만화를 그리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만화 전문 기자로서 언론사에서 일했다.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말이다.
그의 만화는 의외로 한국에서도 저명한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와 연결된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1882년 『지지신보(時事新報)』를 창간했는데, 이는 정부나 특정 정당의 기관지 역할을 하는 언론을 비판하고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를 대중에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강력한 도구로 만화칼럼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이미 영국에서 일찍이 『펀치(Punch)』라는 잡지가 풍자만화를 골자로 하며 유명세를 떨친 바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후쿠자와 유키치의 눈에 띈 인물이 바로 기타자와 라쿠텐이었다.
기타자와 라쿠텐의 본래 이름은 기타자와 야스지(北澤 保次, 1876~1955)였다. 도쿄 칸다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주 총명했다고 한다. 소학교를 다니던 시절, 기슈도쿠가와 가문의 영주와 만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영주는 야스지에게 두건을 벗은 다이코쿠텐(大黒天)을 그려보라는 주문을 했다. 다이코쿠텐은 일본에서 말하는 칠복신 중 하나로, 에비스 맥주 라벨에 그려진 에비스신처럼 푸짐한 풍채에 두건을 쓰고 있다. 그러자 야스지는 머리를 뒤로 젖히며 두건을 떨어뜨린 모습을 그려서 끝까지 벗겨진 신의 머리를 그리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똑똑한 아들이 의사가 되길 바랐다고 한다. 그러나 야스지는 미술에 대한 의욕을 꺾지 못했다. 16세부터 서양미술을 배우기 시작했고 18세엔 그의 화풍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호주인 만화가 난키벨(Frank A. Nankivell)도 만났다. 난키벨이 언급한 제자의 이름 중 야스지는 등장하지 않지만, 박물관에서는 그림의 유사성으로 인해 아마도 그에게 사사하였을 거라 여긴다. 그 후, 야스지는 요코하마의 주간 영자신문 『박스 오브 큐리어스(Box of Curios)』에 취직해 그림을 그렸다. 상업적으로 만화를 그린 첫 번째 만화가의 탄생이었다.
기타자와 야스지는 1899년부터 후쿠자와 유키치의 신문사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지지신보』는 1902년 1월부터 일요일 지면에 만화 특집을 연재했고, 야스지가 만화기자로서 코너를 담당했다. 그는 국제정세에 관한 예리한 통찰력을 쌓아나가고 금방 유명세를 얻었다. 그리고 1903년, 이름을 ‘기타자와 라쿠텐’이라 바꾸었다. 펜네임인 셈이다. 이름을 바꾼 데는 후지무라 미사오라는 청년이 자살하면서 당시 젊은이들 가운데 염세주의가 만연해있던 분위기 속 낙천주의를 꿈꾸던 그의 생각과 관련이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신문사에서 오래 일하던 그는 1905년, 드디어 그의 잡지를 창간했다. 『도쿄퍽(東京パック)』은 화려한 컬러를 사용하고 풍자만화를 위주로 만화 저널리즘의 시대를 열었다. 이 시기는 일본 제국주의의 성장을 자축하고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것을 정당화하던 때였다.
위 그림은 ‘합병의 돌문을 열다’는 이름의 『도쿄퍽(東京パック)』 1910년 9월 1일자 표지다. 그림 속에서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표현한 구도와 내용이 눈길을 끈다. 어둠 속을 헤매는 조선인들에게 구원의 신처럼 짠하고 나타난 건 일본의 아마테라스 신이다. 아마테라스는 조선을 향해 마수를 뻗치던 서구 세력을 몰아내는 빛으로 표현된다. 설명문구는 더욱 가관이다. ‘조선인들이 합병을 즐거워하며 일본의 일부가 되었음을 기뻐한다’고 쓰여 있다.
‘결국은 염색집의 솜씨’라는 그림은 『도쿄퍽(東京パック)』 1910년 9월 20일자에 실렸다. 흰옷을 입은 조선인은 어떤 색으로든 염색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일본인의 색깔로 물들여서 일본인으로 만들겠다는 일본제국의 동화정책과 연결된다. 조선인은 염색집, 즉 일본이 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그림들은 전시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 제국주의 시절 활약하던 시사만화가 기타자와 라쿠텐이지만, 전시실에는 관련된 사진자료나 그림이 거의 없다. 특히 식민지로 삼은 조선과 관련된 내용은 전무하다. 대신 청나라, 러시아 등과 세력다툼, 신여성과 신문물의 등장, 아니면 말년에 그린 평화로운 가족의 모습 정도가 걸려있다.
이렇듯 만화가 제국주의의 선전 역할을 하던 역사는 쏙 빼고 만화의 역사를 설명하는 박물관을 만들어놓았다. 역시 냄새나는 물건엔 뚜껑을 덮어버리는 일본이다. 전원적이고 평화로운 공간에서 자칫 감상적일 수 있던 관람의 끝맛이 씁쓸해져 버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