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마음을 간직했던 후지코 F. 후지오 기념관
혼밥, 혼술이 유행하고 더 이상 혼자 밥 먹는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이라는 게 공인된 이래로 ‘혼족’은 사회 속에 당당히 자리 잡았다. 혼자 카페 가기, 혼자 노래방 가서 노래 부르기, 혼자 영화관 가기 등……. 그들을 위한 1인 전용 좌석, 코인노래방이 생겼다. 뭐든 혼자 잘하는 사람들도 드디어 ‘친구 없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라고 변명할 필요가 없어졌다!
‘혼자 놀기 레벨테스트’라는 게 있다. 혼자 어디까지 해봤는지 한 번 체크해 볼까? 다음 내용은 혼밥천국 일본의 한 미디어에서 혼자서 하기 어려운 순위를 매겨 제작한 계급도에 의한 것이다. 가장 쉽고 보편적인 1단계부터 허들이 높은 5단계까지 있다.
1단계: 일반 식당, 노래방, 영화관
2단계: 패밀리 레스토랑, 뷔페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혼밥을 하고 나름 ‘혼자 놀기’의 정점을 찍은 게 아닌가 자만했었는데, 고작 2단계다.
3단계: 동물원, 캠핑, 볼링장
4단계: 클럽, 해수욕장, 축제와 공연
지난달 놀러 간 캠핑장에서 1평도 안 되는 (마치 관짝처럼 보이는) 텐트를 보고 혼자 캠핑하는 사람이 있다니? 하고 놀랐는데. 3단계와 4단계 모두 해당사항은 없다. 나의 ‘혼자 놀기’ 레벨은 이렇게 낮았던 것인가?
마지막 5단계: 놀이공원, 코스 요리가 나오는 레스토랑
아하! 3단계, 4단계를 건너뛰고 5단계에서 동그라미를 쳐본다. 최근에 출장차 머물렀던 호텔 레스토랑에서 혼자 코스 요리를 먹었다. 처음부터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어영부영하다가 끼니를 놓쳤고 밤늦은 시간에 호텔 주변에 갈만한 식당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밤 10시까지 영업하는 호텔 1층 레스토랑에 가서 아른아른한 촛불을 켜놓고 밤 데이트나 모임을 즐기는 젊은이들 틈에 끼어 코스 메뉴를 주문했다. 나이 지긋한 지배인은 내가 안쓰러웠던지, 아니면 심심해 보였는지 계속 말을 걸어주었다. 혼자 파인다이닝에서 밥을 먹는 나의 모습이 어색하고 부끄러워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 걸지도. 구구절절 설명하게 되는 것도 어쩌면 ‘이 모습과 행동은 본래 내가 하던 게 아니다’고 전하고 싶은 걸까.
어쨌든 레벨테스트 속에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없다. 그건 박물관 종사자로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포인트다. ‘뮤지엄’은 혼자 가기 딱 알맞은 공간이다. 여럿이 함께해도 즐겁지만 오히려 혼자 있을 때 더욱 감상에 집중할 수 있고 뭔가 ‘있어’ 보이기까지 하는 마법의 공간이다. 그래서 그런가. 이곳 뮤지엄을 방문하면서 부끄러워질 줄은 몰랐다. 뚜껑을 열어보니 5단계였다.
일본 도쿄에서 가까운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의 한 전철역에 내렸다. 타마 뉴타운 재개발을 다룬 지브리 애니메이션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平成狸合戦ぽんぽこ)>의 배경이 된 타마구(多摩区)가 가와사키시에 속하는 동네다. 이곳의 이름은 ‘노보리토역(登戸駅)’. 역사에서 조금 걸어서 내려가면 눈에 띄는 버스 정거장이 있다. 도라에몽으로 래핑 한 셔틀버스가 오가는 정거장 앞에는 벌써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아직 쌀쌀한 날씨라 버스가 필요하다. 걸어간다면 30분은 족히 걸린다.
도라에몽 셔틀버스는 사람들을 태우고 출발했다. 이 버스는 오로지 노보리토역과 뮤지엄을 오가기 때문에 탑승객들의 목적지가 같다는 건 명백히 사실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혼자서 탄 사람은 나뿐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 그냥 집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잡아타듯이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굳은 얼굴로 덜커덩거렸다. 약 15분 정도 흘러 거대한 건물 앞에 내렸다. 여기가 바로 2011년 개관해 최근까지 관람객 수가 400만 명 이상으로 집계된다는 대단한 뮤지엄이다. 정식 명칭은 후지코 F. 후지오 뮤지엄(藤子・F・不二雄ミュージアム), 만화 도라에몽의 원작자 후지코 F. 후지오 선생의 작품을 전시한 박물관이다.
기회가 될 때마다 일본 만화를 주제로 답사를 다니는 터라 ‘후지코 F. 후지오 뮤지엄’은 여행지 목록에서도 우선순위에 놓았다. 전설적인 도키와소 멤버이자 도라에몽의 창작자, 그리고 돈보다는 좋아하는 걸 좇으며 살았다는 만화가 후지코 F. 후지오의 박물관이니까. 잘 팔리는 만화가라면 왠지 마감일에 쫓겨 성격이 예민하고 괴팍할 것 같지만, 주변의 평가는 그가 좋은 인품을 가졌다는 걸 말해준다. 젊은 시절 콤비를 이루어 ‘오바케의 Q타로’를 발표했던 후지코 후지오Ⓐ는 오랜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그가 순수한 마음을 지닌 만화가였다고 말했다.
예약한 티켓의 시간대로 입장을 하면, 곧바로 이어지는 1층은 상설전시다. 강제동선이니 다른 곳으로 샐 틈은 없다. 후지코 F. 후지오의 작품세계와 원화, 개인사, 소장품 등 살펴보는 공간이 나열된다. 전시품과 패널을 하나씩 찬찬히 뜯어보면 그가 얼마나 어린이를 생각했는지 느낄 수 있다. 도라에몽은 1970년 학습지 만화로 시작했다. 그런데 학습지 종류는 무려 6가지나 된다! 각기 독자층도 달랐다. 그래서 후지코 F. 후지오는 독자의 연령에 맞춰 도라에몽의 이야기를 다르게 만들었다. 저학년 대상 만화에선 대사도 적고 진구(노비타)의 키도 작다. 고학년 대상 만화에선 사회에 대한 이야기, 연애 같은 소재도 다룬다. 진구의 키도 그만큼 컸다. 당시 어린이 독자들은 도라에몽을 읽으면서 함께 성장했다.
벌써 50년 이상 묵은 도라에몽이 아직도 사랑받는 만화인 데는 미디어 믹스가 큰 몫을 했다. 도라에몽은 1979년 TV 애니메이션화되어 대히트를 기록했다. 후지코 F. 후지오는 애니메이션 감독에게 “만화 ‘사자에상’에 SF를 가미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주세요”라고 주문했다. 그는 주변 어디에나 있는 일상생활과 길거리에서 소재를 찾고 아이와 어른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만화가 되길 소망했다.
직원의 엄격한 관리 아래 조용하고 침잠한 전시 관람을 마치고 2층으로 올라오니 여긴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화사하게 밝아진 조명과 높은 천장, 알록달록하고 시끌벅적한 광장이 펼쳐진다. 아이들이 마구 뒹굴면서 놀 수 있는 푹신한 소파와 만화책은 이곳이 만화가의 박물관이라는 걸 몸소 알게 해 준다. 이곳엔 게임기도 있고 AR 전시체험도 있다. 어디선가 종소리가 울리더니 직원들이 영화관 입장시간이 되었음을 알린다. 이곳엔 단편 애니메이션을 상영하는 ‘F 극장’도 있다.
어린이들의 틈바구니에서 설 자리가 없는 것 같아 3층으로 올라갔다. 실은 후지코 F. 후지오 뮤지엄에서 가장 궁금했던 공간이 여기에 있다. 바로 뮤지엄 카페다. 전시보다 부대시설이 더 좋은 나는 후다닥 웨이팅을 걸었다. 오전 11시인데 벌써 만석이다. 20분 정도 기다리니 부름을 받았다. 카페 내부는 이제껏 다녔던 뮤지엄과 비교하면 굉장히 크고 분위기가 쾌활하다. 그래도 어디선가 기시감이 느껴진다 싶으면 아마도 유니버설스튜디오나 디즈니랜드 속 레스토랑과 닮아 그런 것이다.
직원은 가장 구석진 곳의 햇볕이 뜨거운 자리를 안내해 주며 괜찮냐고 물어봤다. 일광욕한다는 생각으로 괜찮다고 대답했다. 테이블에 앉아 QR 코드로 메뉴판에 접속했다. 이미 마음속에 골라놓은 시그니처 메뉴가 있다. 도라에몽 얼굴을 한 ‘도라에몬쟈카레’! 동그란 카레라이스의 원둘레는 129.3cm, 도라에몽의 키와 동일하다. 참고로 도라에몽은 ‘1293’ 설정을 갖고 있어 키는 129.3cm, 체중도 129.3kg, 가슴둘레도 129.3cm, 생일은 2112년 9월 3일이다. 아, 그런데 옆 테이블을 보니 주문하기는 어렵겠다. 3명의 여자가 카레 하나를 시킨 걸 보고 좌절했다. 도라에몬쟈카레는 2~3인분이다.
그래도 대안은 많다. 별로 고민하지 않고 ‘암기빵 비프스튜’와 ‘도라에몽 블루’를 주문했다. 진구는 수학 시험을 앞두고 공부를 안 해서 쩔쩔매다가 도라에몽에게 ‘암기빵’을 받았다. 식빵을 수학책에 인쇄하듯 찍은 후 먹으면 그 내용이 머릿속에 저절로 암기되는 신비한 물건이다. 비프스튜와 함께 먹으니 더욱 맛있다. ‘도라에몽 블루’는 사탕을 녹인 듯한 달콤한 맛이고 음료 위에 얹은 치즈 폼이 고소하다. 물론 맛보다는 도라에몽의 컬러 블루와 수염 그림을 붙인 빨대가 상징적인 음료수다. 빨대로 음료를 빨아 마시면 도라에몽이 되는 체험 아이템이다. 물론 누군가 앞에서 사진을 찍어줘야 한다.
침묵 속에 후딱 배를 채우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교복을 입고 친구들끼리 놀러 온 남학생들, 옥상 잔디광장에서 어린이들을 풀어놓고 잠시 숨을 돌리는 젊은 부모들, 이젠 다 커버린 청소년 자녀와 함께 온 가족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외롭다. 여긴 혼자 오는 곳이 아니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곳이 바로 5단계 (박물관을 가장한) 놀이공원이었다. 둘, 셋이서 함께 와서 도라에몬쟈카레도 나눠 먹고 도라에몽 수염을 달면 재밌다고 깔깔 웃어주고. 후지코 F. 후지오 뮤지엄은 여럿이 함께해야 더욱 진가를 발휘하는 공간이다. 잔디 광장에서 피스케의 등에 업혀 활짝 웃는 진구와 도라에몽의 사이좋은 모습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