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네 반이 제일 진도 느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는 없지만 시청 전 아무 정보도 보고 싶지 않은 분은 읽지 않기를 권합니다.
몇 주 전 영화관에서 <콘클라베>를 인상 깊게 보았다. 어둡고 붉은빛의 미장센, 랄프 파인즈의 연기, 무엇보다도 결말과 메시지가 주는 강렬함이 크레딧이 올라가는 중에도 여운을 밀어 넣으며 약간의 얼떨떨함을 남겼다.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종류의 결말은 당연히 쌍수 들고 호감이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도 놀랄 정도로 영화의 모든 빌드업은 마지막에 던지는 묵직한 물음을 위해서였다. 솔직히 잠깐 '이렇게까지 메시지만 때리고 끝내도 되나?'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다시 생각하면 그렇게 한 게 이 영화의 대담하고 본새 나는 점이다. (보면서 마지막 반전?이 너무 예상 갔다고 하는 친구들도 있는데…. 나는 눈치가 느린 건지 전혀 예상치 못해서 놀랐다.)
개인적으로 종교가 없다. 오히려 내 안에서 자꾸 잡초처럼 돋아나는 종교에 대한 냉소와 비웃음, 혐오를 잘라내려고 부단히 노력하며 살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여성 배제적인 남성들의 권력과 실력 겨루기를 개운한 마음으로 보기가 어려워졌고, 가톨릭의 전통도 내게는 그중 하나다.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돌아가셨다. 교황의 관이 있는 전통적인 금녀의 공간에 생전 친분이 두터웠던 수녀가 조문하러 가서 소소한 화제가 되었다. '2025년 만에 일어난 기적'이라고 공유가 되던데 2025년 동안이나 여성을 못 들어오게 틀어막은 게 내 생각엔 더 기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콘클라베가 개봉하고 몇 주 만에 진짜 콘클라베가 개최되는 재밌는 현상을 목도할 수 있는 것은 현재라는 역사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소소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비판하는 바가 명확했기에 실제 콘클라베 시행 시 가톨릭계에서 세간 눈치를 좀 보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런 쪽으로 눈치를 보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절차 참고를 위해서 추기경들이 영화를 많이들 보았다고 해서 기분이 좋았다. (퀴어 페미니즘 영화를 강제 시청한 중년 기득권 백인 남성이 여럿! 하하.)
생각보다 길지 않은 콘클라베 절차를 마치고 선출된 새 교황 레오는 비교적 젊고 진보적인 편이라고 하니 결과로써도 다행이다. 세계에도 가톨릭계에도 참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다. 거북이 속도겠지만 새 교황이 교회를 조금씩이나마 더 진보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주길. 2025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여성 배제적인 문화가 가톨릭은 원래 그렇다는 인식으로 용인되지 않게 될 수 있길. (유럽 아무 나라 의회에서 여성은 의원이 못 되는 법이 있다고 하면 국제사회가 뒤집어질 것이다. 근데 바티칸은 그걸 한다.) 책 펴, 너네 반이 제일 진도 느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