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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씨 도 Nov 07. 2022

파론호수와 69호수 중 어디가 더 좋으셨나요?

고생과 행복의 법칙


페루의 수도 리마(Lima)에서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8시간을 달리면 와라즈(Huaraz)라는 도시에 도착한다. 해발 3,000m가 넘는 이곳은 많은 여행자들에게 파론호수와 69호수 투어의 출발점으로 유명한 곳이다. 나 역시 투어에 참여하기 위해 야간 버스를 타고 와라즈로 향했다. 청명한 에메랄드 색 호수에 반해 이미 여행 전부터 많은 기대를 했던 곳이다. 두 호수 중 더 끌렸던 곳은 파론호수였는데 69호수보다 조금 더 연한 물색과 높은 전망대에서 호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두 호수 모두 4,000m가 넘는 곳에 위치해 있지만 투어 버스가 비포장도로를 장장 3시간을 달려 여행객들을 꽤 높은 고도까지 실어다 준다. 첫날 파론호수의 경우 버스에 내리자마자 바로 앞에 호수가 있었고 걸어서 20분 정도 더 올라가니 사진에서 보았던 뷰 포인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때 처음으로 고산 증세를 느꼈다. 평소보다 몸이 무거웠고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코스 자체가 짧아서인지 트레킹을 하는 게 고역까진 아니었다. 이 정도의 고산 증세라면 69호수도 큰 무리 없이 다녀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트레킹 전날 등산화를 빌리고 다녀온 사람들의 힘들다는 후기를 들었을 때도 체력에 대해 자신이 있었기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파론호수 photo by 제씨



다음날 새벽 5시에 출발한 버스는 8시가 조금 넘어서야 우리를 내려주었다. 내리자마자 보이는 풍경은 파론호수와 너무 달랐다. 우리를 맞이한 건 아름다운 호수가 아닌 높이 솟은 거대한 산맥들과 어디까지 이어졌는지 알 수 없는 광활한 평지였다. 거기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듯한 우중충한 날씨는 그곳을 반지의 제왕의 중간계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살짝 겁을 먹고 시작했지만 약간 숨이 찬 걸 제외하고는 일반 평지를 걷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역시 고산병 따위는 내게 별거 아닌 것만 같았다. 즐거운 마음으로 동행들과 수다를 떨며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하면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69호수 트레킹의 시작 photo by 제씨



어느새 평지가 끝나고 오르막길이 시작되었다. 그때 깨달았다. 69호수 트레킹은 파론호수와 비교할 수 없는 가히 어나더 레벨(another level)이라는 것을.. 파론호수가 경보였다면 69호수는 100m 달리기 경주였다. 심장이 뛰는 게 범상치 않았다. 천천히 오르막길을 올랐을 뿐인데도 온몸이 무거웠고 다리에 10kg 추를 매단 것처럼 한발 한발 내딛는 게 고역이었다. 나도 동행들도 점점 말이 없어졌고 주변은 숨소리만 가득했다. 우리에게 대화는 사치가 되었다.



다른 사람과 속도를 맞추다 보니 몸이 더 힘든 것 같아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나만의 속도를 유지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어서 빨리 호수가 보이기를 바라며 걸었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저 멀리 Lag.69라고 쓰여있는 팻말이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팻말은 호수까지 1km가 남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1km라는 구체적인 숫자는 끝이 안 보이는 여정에 지쳤던 내게 더 나아갈 힘을 주는 듯했다. 이후 또다시 오르막이 나타났지만 직감적으로 이것이 마지막 오르막임을 알았다. '이끝에 분명 69호수가 있다!'



마지막 오르막 photo by 제씨



오르막 끝에 다다르자 69호수의 일부가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 냇가처럼 보이던 호수는 가까워질수록 점점 커지더니 마침내 나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동시에 목울대가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차올랐다. 세상에 이런 곳이 존재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그리고 69호수를 보기 위한 그 모든 고생이 당연하다고 생각될 만큼 호수는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하늘이 온통 안개로 가득 차 빛이 없는데도 호수는 저 홀로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한동안 넋을 놓고 호수를 바라봤다.



69호수 photo by 제씨



만일 누군가 나에게 파론호수와 69호수 둘 중 어디가 더 좋았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69호수를 택할 것이다. 호수는 여행 전 사진으로 보았던 것과 같은 모습이었지만 내가 호수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여행 전과 전혀 같지 않았다. 호수가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호수를 보기 위해 들인 나의 노력과 고생이 보상받는 느낌에 눈물이 났던 걸까? 둘 다 맞지만 비율로 따지면 내겐 후자의 이유가 더 컸다. 두 호수 아름다웠으나 그럼에도 69호수가 내 마음에 더 큰 감동을 주었던 건 호수를 보기 위해 들인 시간과 노력이 더 컸기 때문이다.


            

고생과 행복은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고생이 클수록 행복도 커진다. 그냥 마시는 막걸리보다 등산 후 마시는 막걸리가 더 시원하고 달달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분명 막걸리의 맛은 변함이 없지만 막걸리에 대해 느끼는 행복의 크기는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고생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누구의 말마따나 고생도 젊음의 특권일 수 있다. 다시 일상으로 회복할 힘이 우리에겐 충분하기 때문이다. 젊다고 하기도 늙었다고 하기도 애매한 서른 중반의 나이를 먹은 지금. 아직까진 더 큰 행복을 위해 더 큰 고생에 기꺼이 몸을 던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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