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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애 Aug 27. 2022

문학과 먹고사니즘

2022년, 아직도 장편소설을 쓰겠다는 나

읽히지 않는 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 창작자는 온 힘과 정성을 다해 세상에 내놓지만 가족 친구 이외엔 아무도 찾지 않아 덩그러니 남겨진 책 한 권. 그 글과 이야기는 어떤 가치를 갖는 걸까. 작가의 사후에조차 아무도 찾지 않는다 해도 가치가 있는 걸까. 그렇게까지 해서 쓰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한 자기만족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가 있는 행위인지.


취미로 글을 쓰거나 다른 소득이 있어 글에만 몰두할 수 있는 사람의 경우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겠지만 평범한 사람이 생활을 영위하며 소설을 쓴다면 삶은 항상 비탈길 언저리이다. 청탁을 받아 단편을 쓰고 그 단편들을 묶어 책을 내는 경우엔 버겁더라도 글을 통해 생활이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청탁을 꾸준히 받지 못하는 작가이거나 집필하고자 하는 세계가 플롯과 스토리가 가득한 장편의 세상에 있는 작가라면 생활을 택하거나 포기하거나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좌절하기 십상이다. 꿈이 현실이라 말하기엔 이미, 어느새, 어른이다.


최소한의 생계를 위한 돈만 벌고 나머지 시간은 글을 쓰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에겐 묻고 싶다. 정말 한 번뿐인 삶을 그리 살아도 괜찮겠느냐고. 집도, 노후도, 어쩌면 가까운 미래까지도 모두 불확실한 상태로 최저생계비만 벌어 살 수 있겠느냐고. 스물엔 그럴 수 있어도 어쩌면 서른에도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당신의 마흔에도, 쉰에도, 예순에도 그런 생활이 가능하겠느냐고.


그럴 때면 또 혹자는 말한다. 이삼 년 바짝 열심히 쓰고 그래도 안 되면 포기하라고. 현실을 생각하라고. 그런데 창작을 하는 입장에서는 그 말이 슬프다. 문학이, 창작이, 꿈꾸었던 직업과 인생이 이삼 년 안에 되지 않으면 포기해야 하는 그런 일이었는지. 그렇다면 예술은 크게 성공하거나 많은 상속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인지. 소설이고 그림이었는지. 시이고, 무용이고, 읊조리듯 토해내는 노래였는지.


그러면 남들과 같이 취업을 하고 남는 시간에 작품을 쓰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퇴근한 이후에, 주말에 틈틈이 쓰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이제 그런 말에는 속이 상하지도 않는다. 장편소설 한 편을 쓰는데 들어가는 시간과 에너지를 알면 결코 꺼낼 수 없는 말이기에, 살아가는 세계가 달라 하는 조언이겠거니 하며 그저 웃고 넘긴다. 아직 그 정도의 내공을 쌓지 못했다고.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한두 권 정도는 도전해보겠다고.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쉬운 삶은 없기에 쉽사리 징징대지 못한다. 또 소설을 쓰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기에 타인을 탓하지도 않는다. 읽고 풀면 답이 나오는 수학 문제와 달리 정답이 있는 직군이 아니라 가끔은 답답하지만, 이 길을 끝까지 걷겠다 아집을 부려보며 오늘도 노트북 앞에 앉는다.









내년엔 뭐 먹고살지. 어떤 방법으로 돈을 벌어 생활을 유지하지. 소설을 쓰지 못해도 돈을 벌어야 하나. 아니면 잘 될 거라는 희망 하나로 꿋꿋이 버티며 창작을 해야 하나. 왜 시중에 장편소설이 많지 않은지, 왜 익숙한 작가들의 신작들만이 계속 나오는지 또 한 번 깨닫는 요즘이다.


그럼에도 계속 쓰려한다.

포기라니, 훗 어림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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