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처지는 것에 대한 불안, 잊히는 일에 대한 우울은 학생 때 끝나는 일인 줄로만 알았다. 1등부터 꼴등까지 줄을 세우고 누구는 서울대 누구는 어느대 라벨을 붙이는 일 역시 학교만 졸업하면 끝나는 일인 줄 알았던 시절이 있었더랬다. 몇 살에 연봉이 얼마여야 하네, 얼마를 모았어야 하네, 집은 얼마고 금수저가 흙수저가 상급지로의 이동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들을 평생 들어야 하는 건지 미리 알았더라면 아마 학창 시절에 공부 따위는 진즉에 때려치웠을 거다. 인생에 등급을 매기는 일에 다들 이렇게들까지 진심일 줄이야.
며칠 전에 인터넷 기사 하나를 읽었다. 결혼 전까지 3천만 원을 모으지 못한 여자 하고는 결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조의 커뮤니티의 글을 복붙해온 기사였다. 3억이 있든 3백이 있든 어차피 타인의 사정일 뿐인데. 언제나 그렇듯 기사 말미엔 댓글 몇 개를 끌고 와 퐈이야! 온라인 여론에 불을 붙였다. 공감 혹은 논란 혹은 분란의 소지를 만드는, 전형적인 포털형 렉카 기사였다.
사람들은 기자(라고 불러주어야 하나)의 기대에 부응하듯 열띤 반응을 보여주었다. 경제관념이 어쩌고 저쩌고, 집에 갚아야 할 빚이 있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유형은 걸러야 얼씨구절씨구. 사랑한다는, 무려 결혼까지 생각한다는 사람의 사정을 불특정 다수가 포진한 커뮤니티의 심판대에 올려놓는 사람의 심리도 이해가지 않았지만 남의 인생사를 계량해 등급을 매기는 사람들의 행동 역시 공감이 되진 않았다. 대학에 '인서울'이 가능한 등급이 있다면 인생에도 '인서울'이 가능한 계급이 있어, 여기에 들어가지 못하면 결혼도 하지 말고 애도 낳지 말라는 거대한 물결이었다. 우리나라 출산율이 이 모양인 이유는 역시나 다름 아닌 당신 그리고 우리의 상처 난 마음 때문이었구나.
학생 때는 1등급을 받고 유수한 대학에 가서 좋은 회사에 취직을 하고. 부모의 도움을 받을 수 없으면 알뜰살뜰 악착같이 모으고 콩고물을 받아먹을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그렇게 몇 천, 몇 억을 모아 서울에 있는 아파트에 전세로 들어가고. 상급지(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단어다.)로 이사 갈 준비를 위해 대출을 받고. 젊어 보이지 않을 거면 진짜 어려야 하고. 날씬해야 하고. 30대, 40대에 자산 몇 억은 있어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이고.
내가 불특정 다수가 모인 커뮤니티에 가입해 활동을 하지 않는 이유이다. 포털사이트 기사에 달린 댓글들 역시 웬만하면 무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도대체 '성공'한 인생의 기준은 무엇이고 '실패'한 인생의 기준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학벌이 높아야, 예뻐야, 날씬해야, 친구가 많아야, 돈이 많아야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그럼 그 기준이 되는 등급은 누가 어떻게 만드는 건지. 아니, 사람이 나고 살고 죽는 일에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적 개념을 적용하는 일이 가당키나 한지. 감히 한 사람의 인생에. 누가 감히.
사람이 사는 지역 혹은 집값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냥 그 동네에 사는구나, 하고 만다. 가까우면 자주 만날 수 있겠다, 멀면 멀리 사는구나 한다. 딱 거기까지다. 그 이상은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객관적 미의 기준은 잃어버린 지 오래다. 어떤 눈에, 어떤 코에, 어떤 키에, 어떤 몸무게를 원했던 나이는 스무 살 무렵이 마지막이었다. 그저 예쁜 사람이 예쁘다. 그 사람은 몸무게가 40kg일 수도, 120kg일 수도 있다. 콧대의 높이나 쌍꺼풀, 치아, 주름, 가슴의 크기 등은 그저 개개인이 가진 특성 중 하나일 뿐이다. 따스한 눈빛을 가진 사람, 배려가 몸에 밴 사람,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자주 웃는 사람을 좋아한다. 말투가 조금 틱틱거려도 마음이 전해지면 그마저도 희석된다. 내겐 그런 사람이 예쁜 사람이다.
종교나 취향 등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건 내가 종교가 없어서 더 열린 마음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나처럼 종교가 없는 친구도, 천주교나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의 종교를 가진 친구도 다 괜찮다. 이성애자이든 동성애자이든 비혼이든 재혼이든 친구가 되는데 그런 게 무슨 문제일까. 아, 심지어는 나이도 상관없다. 외국으로 유학 한 번 다녀오지 않았지만 여든의 언니와도 열다섯 청소년과도 친구가 되는데 거리낌이 없다. 다만 나의 사람이 될 분들이라면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작은 애정이 있는 귀인이면 좋겠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지구이든, 그 무엇이든.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전력으로 달리고 나면 약간의 슬픔이 깃든 공허함이 찾아온다. 그건 목표의 달성여부와는 무관하다. 물론 꿈꾸던 목표를 이루어낸다면 -시험에 통과한다든가,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었다든가- 기분도 좋고 성취감도 느껴지겠지만 그 감정이 평생 가는 건 아니지 않나. 우리는 무언가를 이루어내고 약간의 시간이 흐르면 사실 별 일 아니었는데 하는 내부자적 마인드에 초연해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서른이면, 마흔이면, 쉰이면 얼마를 모았어야 하지, 노후준비는 어디까지는 되어있어야 하지, 어느 동네에 집값이 어느 정도는 되는 집에 살아야 하지, 배우자가 이러쿵저러쿵 부모가 자식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사회와 타인의 잣대에 당신이 불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1등급이 아니라고 해서 나머지 96%의 학생들이 좌절하거나 자학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열심히'와 '최선'의 가치를 부정하자는 게 아니라, 노력의 숭고함을 노오력이라 비꼬려는 게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이 자신의 속도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당신을 기특해했으면 좋겠다. 바쁘다바빠현대사회알쏭달쏭디지털세상에서 오늘도 당신은 삶이라는 무게를 지고 무사히 버텼으니까. 살아냈으니까. 그저 지구의 자전으로 만들어진 오늘 하루가 당신만의 시간으로 꾹꾹 채워진 거니까.
줄을 세워 행복한 사람들은 아마 줄의 가장 앞쪽에 서있는 사람들일 테다. 꼬리칸에서 중간칸으로 옮겨 타서 행복하다는 사람도 있을 테지. 하지만 누구에게도 타인의 삶을 저울질할 잣대는 주어져 있지 않으며, 당신은 그저 스스로의 오늘에 대한 감상만을 갖고 있으면 된다. 친구들의 인스타 새 피드를 부러워할 필요도, 커뮤니티(그보다 더 큰 문제인 커뮤니티 글들을 긁어온 렉카 기사들) 내 익명의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의기소침해질 필요도 없다. 내 몸과 마음, 생각은 어차피 평생 온전한 내 것이고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까지 결국엔 '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