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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타샤 Dec 10. 2021

갈림길 앞에서

바르셀로나는 로마와 더불어 조상 잘 만나 3대가 잘 사는 그런 도시가 아닐까 싶다.

가우디를 위한, 가우디에 의한, 가우디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바르셀로나에는 가우디의 대표작 중 하나로 도시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고 가우디의 건축양식이 돋보이는 구엘 공원이 있다.


지금까지 바르셀로나는 한 6번 정도를 갔지만 구엘 공원을 제대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번은 일정을 너무 빡빡하게 짜는 바람에 시간이 없어서, 한번은 유료인 줄 모르고 갔다가 카드결제가 안되고(해외에서 인증번호와 유심 문제 등등을 겪게 된다면 진짜 길거리에서 국적을 잃은 기분과 온갖 육두문자를 내뱉게 된다!) 그리고 또 한번은 귀찮아서, 다음에 가지 뭐 등등 여러 핑계로 계속 미뤄왔다.


미루고 미루다 이번에는 정말 꼭 가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12월의 바르셀로나는 강한 바람이 불지만 햇살이 유난히도 따뜻하고 맑은 날씨라 호텔에만 있으면 왠지 안될 거 같았다. 어제도 비행이 끝난 후 2만보에 가까운 관광을 하느라 몸이 무척 무거웠지만 창가로 내려 앉은 햇빛과 파란 하늘을 보니 몸이 저절로 나갈 채비를 하게 되었다.


오전 10시쯤,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지하 동굴 같은 바르셀로나의 지하철을 타고 구엘 공원으로 향했다. 

도심이 한 눈에 내려 보인다는 것은 그 곳이 꽤 높은 곳에 위치 했다는 법이다.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이 사실에 절망하며 눈 앞에 아득히 펼쳐진 경사를 한 걸음씩 오르기 시작했다.

마스크 안으로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아 괜히 올라 왔나…’ 하고 생각이 들 때 쯤 어? 가우디다’ 싶은 담벼락의 타일이 보이기 시작했고, 드디어 그 유명한 구엘 공원에 도착했다!

구엘 공원은 입구가 여러 개인데 내가 들어간 곳은 가장 유명한 건축물과 바로 옆에 연결된 쪽이어서 몇 걸음 안 가고 흔히 유명 관광지 사진으로 접했던 구엘 공원의 모습이 나타났다. 

헨델과 그레텔의 과자 집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가우디의 손을 거친 건축물들은 동화 같고 귀여우면서도 우아하고 고급스러웠다. 

저 멀리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과 함께 바르셀로나의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길게 늘어진 타일 벤치에서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따사로운 12월의 햇살을 받으며 구엘 공원의 싱그러운 내음을 들이켰다.

 

공원 안에는 신기하게도 학교인지 유치원인지 시설이 있었는데 아이들이 한창 즐겁게 뛰어 노는 소리가 들려왔다. 건축과 철학에 문외한인 나지만 가우디가 전세계에서 모여든 관광객과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자신의 작품과 함께 어우러지는 이 모습을 본다면 그는 어떻게 상상할지 궁금했다.


한참을 앉아서 멍하게 평온을 즐기다가 공원의 곳곳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공원이 워낙 크고 산책로가 여러 개라 발길이 닿는 대로 가보기로 했다.  

말은 발길이 닿는 대로였지만 걷다 보면 길이 갈라지는 곳에 표지판이 있는 곳도, 없는 곳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무심결에 내가 항상 표지판이 있고, 내가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곳만 선택하는 것을 알아 챘다.


발길이 닿는 대로 간다. 


그건 내 여행의 원칙 같은 것이었다. 물론 계획하기를 좋아하는 나라서 대강의 계획은 짜 두지만 그래도 그 때 그 때 날씨와 기분, 상황에 따라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그렇게 여행하다 보면 정말 생각지 못한 곳에서 황홀을 맛보기도 했고, 아주 가끔은 위험한 상황이 생기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 모두가 여행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모험을 주저 했고 내가 모르거나, 의심이 되면 절대로 시도 하지 않고 늘 계획한 것, 명확한 것, 안전한 것만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즉흥적으로 여행 하다가 위험을 몇 번 겪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겁이 많아지고 걱정 거리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걱정과 겁은 나 자신에 대한 것보다 나를 둘러싼 것들과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무슨 일이 발생했을 때 정리해야 할 것들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걱정이 부쩍 커진 것이다. 내가 특별히 사랑이 많은 사람, 아량이 있는 사람이 아님에도 나는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나를 걱정할 가족과 친구들을 더 많이 떠올리고 걱정하게 됐다. 

또 별로 가진 것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그 남은 물건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걱정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잃을 것이 없으면서도 잃을 것들을 걱정하는 셈이다.

노파심이란 게 이런 걸까. 

그런 단어를 쓰기엔 난 너무 어리고 애송이지만 예전에는 해보지 않았던 생각들이란 점에서 이런 게 노파심이 아닐까 싶다. 이전에는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고 내가 제일 중요한 존재였다면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면서 나는 다소 이기적이었던 마음에서 내 주변을 한번 더 살펴 보게 되었다. 그들의 안위는 나의 그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걸 떠올리는 일들이 버겁거나 슬프지 않고 되레 행복한 것이 되었다. 내가 지킬 것들과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건 무한 에너지를 가져다 주는 위대한 것이다. 

항상 그들의 소식이 궁금하고 걱정되고, 부디 건강하게 잘 지내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내가 괜한 폐를 끼치거나 걱정을 시키지 않는 것은 이제 그건 아주 중요한 일이 되어버렸다.

내가 만약에라도 이 곳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들은 얼마나 걱정하고 슬퍼할지, 그렇게 경황이 없는 중에 회사와 어떻게 도하에 남겨진 내 삶과 상황들을 처리할지…

지나치게 드라마틱한 일까지 상상하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그 만큼 나는 많은 것들을 걱정하게 되었고, 그래서 더 많이 망설이게 되었다. 


갈림길 앞에서 나는 발길이 닿던 대로 가던 예전의 나를 잠시 떠올려보다가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이 뒤를 이어 재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이내 Salida(출구)를 가리키는 화살표를 따라 천천히, 기쁜 마음으로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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