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부끄럽지만 제주도를 갈 때만 하더라도 내가 바랐던 것은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상쾌한 바닷바람이었다. 부러 버스를 타고, 조용한 올레길을 걸어보며 진짜 제주의 풍경을 보고 싶었다.
그 사이로 나를 짓눌렀던 부정적인 감정들을 멀리멀리 날려 보내고 싶었다. 그 외에는 달리 기대했던 바는 없었고 더 솔직히는 그냥 사람들로부터 도망치고,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실제로 내가 마주한 것은 기대했던 풍경들이 아니라 돌담 골목 사이사이를 메운 할머니들이었다.
반짝이는 제주의 자연과 알록달록한 슬레이트 지붕, 돌담들이 즐비한 제주의 풍경보다도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이 할머니들이었다.
하루 평균 2만 보를 걸으며 제주도의 골목을 걷다 보면 연세가 지긋하신 할머니들을 많이 마주했다.
할머니들은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정겨움만은 전해지는 제주도 사투리를 빠르게 구사하시며 느릿하게 걸어가신다. 손등에 빼곡히 올라온 주름과 굽은 등은 한눈에도 짙은 세월을 느낄 수 있었다.
할머니들 대다수는 해녀 출신으로 바다로, 밭으로 오가며 평생을 살아오셨다.
해녀로 살아온 80-90세에 이르는 할머니들은 일제 강점기, 4.3 그리고 한국 전쟁까지. 참혹하고 모진 삶을 버텨내고 살아오신 분들이다.
사랑하는 가족들, 함께 울고 웃던 이웃들을 한순간에 잃고 모든 것이 다 타버렸다.
제주에 여자가 많은 이유 중 하나는 4.3의 참상과 전쟁, 그 지독한 날 동안 많은 수의 남자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촌리는 4.3 이후에 무남촌(無男村)으로 불리기도 했다.
남겨진 여인들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바다를 터삼아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를 돌보며 함께 살아왔다.
그렇기에 해녀는 단지 직업이 아니라 역사의 상흔 위로 피어난 공동체의 사랑과 연대, 희망 그 자체이다.
폐허가 된 땅에서 그들은 슬픔도 삼킨 채 돌담을 쌓고, 파를 심고, 전복을 따며 삶을 일궈낸 것이다.
그 시절 그들은 섬의 거친 바람과 파도에도 물질을 멈출 수 없었고 쉼조차 사치인 그런 세월을 보냈다.
그녀들에게 삶이란 살아가는 것이기보다 견뎌내는 것에 가까웠으리라.
요즘 제주는 연일 눈부신 아름다움의 향연이다.
코로나 시국에도 제주도를 향한 사람들의 사랑은 식을 줄 몰랐고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제주도를 찾는다.
제주도가 그토록 보배로울 수 있는 건 단지 자연이 만들어낸 눈부신 그림 때문이 아니라 운명에 순응하며 기꺼이 살아낸 할머니들의 위대한 인내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코로나로 천직이라 여겼던 직장을 잃고 준비하던 시험도 떨어진 후로 절망과 두려움으로 지냈다. 다시 복직을 하게 되었을 때도 걱정과 불안은 멈추지 않았고 마음에는 늘 여유가 없었다. 타인의 한마디도 두 번 세 번 꼬아 생각하며 스스로 동굴을 파 들어갔다. 긴 휴가를 떠나 와서도 조급한 마음에 마음 편히 쉬지 못한 채 전전긍긍이었다.
그 마음을 회피하기 위해 제주도로 도망을 갔다.
도망간 제주도가 결코 천국은 아니었다. 하지만 도망간 곳에서 해답은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계속 걱정을 하고 때때로 불안에 떨며 잠을 설치기도 할 것이다. 어떤 날은 우울함에 눈물도 흘릴 것이다.
그러나 제주도의 할망들이 그랬듯, 절망의 끝에서도 다시 희망을 피워낼 것이며, 강하고 단단하게 버텨낼 것이다. 내게 주어진 운명을 끈질기게 살아낼 것이다.
삶의 어떤 지점에서도 우리는 견뎌낼 수 있으며, 그곳에서 눈부심이 태어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