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텁지근한 공기 사이로 화려한 네온사인과 조명들로 싱가포르의 밤은 눈부시게 빛이 난다. 높게 솟아 오른 빌딩 사이로 불어오는 습한 바람은 휘황찬란한 야경과 어우러져 꽤 근사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밤의 어스름이 내리고 알록달록한 조명이 하나씩 켜질 때면 식당들이 즐비한 Amoy st에는 퇴근 후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우리 역시 길었던 하루를 정리하고 단골 고깃집으로 향했다. 뿌연 연기 틈으로 영어와 한국어 대화가 시끌벅적 퍼지고, 종업원들은 정신없이 움직이고, 돼지고기 냄새가 기분 좋게 퍼지고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주문을 하고 고기가 다 구워지길 조급하게 기다리며 때때로 젓가락으로 고기를 지져가며 빨리 익으라며 주문을 외우기도 한다. 푸짐하게 차려진 야채와 밑반찬은 잠시 여기가 한국인지 싱가포르인지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한다.
손바닥에 겹겹이 쌓은 야채를 준비한 뒤, 갈색 빛을 입은 고기 한 점을 얹고 마늘과 쌈장을 올려 곱게 접은 후 입으로 넣으면 온 몸에 긴장이 풀리면서 뇌가 갑자기 깨어나는 기분이 든다. ‘맛있다’라는 단어를 다양하게 변형해가며 계속 감탄하며 부지런히 먹어댄다. 고기가 점점 줄어가면 때에 맞춰 된장찌개와 공깃밥을 주문해서 끊김 없이 먹을 수 있게 준비한다.
그리고 그때쯤, 어느 정도 배가 차오르면 우리는 슬슬 그 간의 못다 한 회포를 풀어낸다.
각국에서 모여든 인재들 틈에서도 능력을 발휘하며 싱가포르에 사는 J와 일주일에 평균 세 나라를 오가며 여행하듯 살아가는 나는 언뜻 보기에 나름 번쩍번쩍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흔히 SNS에서 즐겁고 행복한 순간들만 있는 듯한, 인생에 어두운 면이라고 없는 그런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매캐한 삼겹살 연기 틈으로 삶의 걱정들을 털어놓으며 뭐 하나 쉬운 게 없다며 각자 삶의 무게를 토해냈다. 인생이란 왜 이렇게 지난하고 고단함의 연속인지 토로하며 탄산이 잔뜩 들어간 제로 콜라에서 쓰디쓴 소주의 맛을 떠올렸다.
그녀가 “사는 게 뭔지…” 라며 젓가락으로 된장찌개에 말아 놓은 밥을 뒤적거릴 때 나는 “그러게…” 하며 쓴 맛의 동질감을 느꼈고, 차라리 모르는 감정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상상했다.
이만큼이면 충분하다고 느꼈던 곳에 다다랐을 때에는 더 멀고 높은 곳이 기다리고, 이쯤이면 끝이 날 거 같았던 문제는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며 두더지 게임처럼 튀어 오른다. 어쩌면 인생은 언젠가는 손에 닿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허덕이고 방황하며 인생의 전체 기간 동안 해답이 없는 문제들에 걱정과 한숨만 더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교복을 입고 언덕길을 내려오며 떡볶이에 두 눈이 반짝이던 우리는 그때는 상상도 못 했던 인생의 진짜 모습을 마주하고 있다. 마음의 시간은 여전히 수능을 걱정하지만 수요일 석식 메뉴에 행복해하던 19살에 멈춰있는데 현실은 짙어진 삶의 무게와 버거운 문제들로 가득한 30대 중반으로 흘러버렸다.
아무리 고민해봐도 풀리지 않는 걱정처럼 미처 다 끝내지 못한 된장찌개와 잔치국수를 뒤로 하고 우리는 와인 바로 자리를 옮겼다.
한쪽으로는 이름도 어려운 와인으로 가득 찬 와인 타워가 있고, 그 옆으로는 양복을 빼 입은 중년의 백인 남자가 두꺼운 잔에 얼음을 넣고 타 먹을 듯한 위스키들로 가득한 위스키 타워가 있었다. 두 개의 거대한 타워 뒤로 더 높은 빌딩 숲이 새삼 이곳이 싱가포르임을 상기시켰다.
분위기 있는 음악과 화기애애한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틈틈이 실없는 농담을 섞어가며 주변의 여러 경우도 떠올려보며 인생의 어려움에 대해 계속 이야기했다.
늦은 밤이 되어 더운 공기가 내려앉은 거리는 고요했고, 마시는 숨에 싱가포르의 밤 내음이 차분하게 느껴졌다. J와 헤어져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오늘의 만남을 곱씹어 보았다.
그 누구도 인생이라는 마라톤에서는 고민과 걱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다가도 그럼에도 내가 제일 힘든 것 같은 불행한 생각이 동시에 밀려왔다. 모두에게 불공평하다는 점에서 인생이 아주 공평한 것일 수도 있다.
꼬리를 물던 복잡한 생각과 걱정을 더 이상 들여다보기도 지쳐서 그냥 포기한 채 잠을 청했다.
다음날 눈을 채 뜨기도 전에 드르르 거리는 휴대폰 진동에 엉겁결에 전화를 받았다. 한껏 상기된 목소리의 주인공은 J였다. 그녀는 지금 호텔 로비니까 당장 내려오라고 한다. 나는 몽롱한 중에 잠긴 목소리로 “어? 어? 뭐라고?”반복하니 그녀는 지금 카야 토스트 먹으러 가자며 빨리 나오라고 재촉했다.
띵띵 부은 얼굴로 고양이 세수를 하고, 아직 고기 냄새가 덜 빠진 옷을 걸치고 내려갔더니 헐렁한 운동복 차림에 머리만 대충 질끈 묶고 세수는 했을까 싶은 그녀가 손을 흔들며 웃고 있었다. 어찌나 해맑게 웃고 있는지 황당해서 나까지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호텔 밖으로 나오니 아침 8시도 채 안된 시간이었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일과를 바쁘게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 틈을 비집고 카야 토스트 맛집에 도착했다. 가게에 들어서자 달콤한 냄새가 금세 입맛을 돋우었다.
특별한 인테리어랄 것도 없이 심플한 테이블과 의자가 몇 개 놓인 게 다인 가게였다. 벽에 걸린 선풍기는 무더운 아침 열기를 식히려 덜덜거리며 돌아가고 있었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앉아 간단히 아침을 먹고 있었다.
우리는 커피와 카야 토스트를 양껏 주문한 뒤 테이블에 앉아 이 상황을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우리는 정말 눈 뜨자마자 가장 못생기고 편한 모습으로 약속도 없이 만나 (아니, 내가 끌려온 것이다!) 카야 토스트를 먹겠다고 앉아있는 것이었다.
알맞게 구워진 빵 사이에 카야잼과 버터가 듬뿍 발라진 카야 토스트를 한입 베어 물고 언제나처럼 ‘맛있다’, ‘진짜 맛있다’, ‘완전 맛있다’ 등 맛있다는 표현을 다양하게 변형하며 감탄했다. 연유를 탄 진한 커피로 덜 깬 잠을 깨우고서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수다를 떨었고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한참을 웃었다.
배를 든든히 채운 뒤 우리는 오늘 하루도 파이팅 하자며 활기찬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하루를 위해 헤어졌다. 마음에 떠오른 희망과 행복이 뜨거운 태양 아래 늘어진 빌딩 숲과 초록색의 열대 식물들 사이로 끈끈하게 퍼져 나갔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사는 건 늘 어려움과 힘듦의 연속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 틈으로 행복이 태어날 것이고, 즐거움도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아주 사소한 일에 여러 번 웃게 될지도 모르겠다. 찰나에 피어난 행복은 아주 달콤한 추억이 되어 우리를 버티게 할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흐르든, 얼마나 큰 어려움이 닥치든 우리는 그 달콤했던 추억 조각들로 한 번은 더 웃으며 잘 살아낼 것이다.
무더운 여름 그 가게에서 우리가 웃고 떠들며 먹던 카야 토스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