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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녀의 인생철학 Oct 15. 2021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 사람 있나요?

좋은 세상 만들기 프로젝트

지금 미운 사람이 있나요?
한번 떠올려 보시겠어요?
혹시 미운 사람, 보기 싫은 사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사람 있으신가요?


미운 사람이 한 명도 떠오르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는 못하겠다. 이 글을 보면서 어? 난 없는데?라고 하는 사람이 많으면 좋겠지만, 대부분 한 명쯤은 떠오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친구들의 고민을 들어보면,

본인 자체의 고민으로 힘들어하기보다는 주변인들로부터 힘들어하는 것을 많이 느끼곤 한다.


직장 동료 때문에 너무 힘들어.
가족 때문에 너무 힘들어.
남편 때문에, 자식 때문에, 시부모님 때문에,
친구 때문에…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가족이 되었든, 직장 동료가 되었든, 친구가 되었든,

어찌 됐든 모든 고민은 사람으로 인한 고민이 대부분을 차지하곤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인간이 주가 되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가지각색의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사회를 형성했기 때문에 인간을 접하지 않고 혼자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어? 나는 혼자 잘 살 수 있는데?


그렇다. 혼자 잘 살 순 있다. 아무도 접하지 않고 외출도 하지 않은 채 나 홀로 집에서만 살아가더라도 밥은 먹고살아야 될 것이다. 쌀이야 인터넷 쇼핑으로 주문해서 받아 집에서 내가 해 먹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내 입으로 들어갈 쌀은 누가 만들어 주는가? 그 쌀을 판매하는 쇼핑몰 업체가 없다면? 주문해서 나에게 배달해주시는 배달원이 없다면?


그리고 집에 있으면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서 1년 365일을 버티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혼자 집에 있으면서 할 수 있는 것이 독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글쓰기, 혹은 취미 등 여러 가지를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만, 대부분 많이 하는 것이 아무래도 TV 시청이 아닐까?


요즘 전 세계로 핫한 ‘오징어 게임’을 예로 들어 보자.

이 오징어 게임의 시나리오를 만든 것도 사람이다. 이 ‘오징어 게임’의 시나리오도 10년 전에 완성된 것이라고 한다. 10년 동안 ‘너무 잔인하다.’, ‘시대상에 맞지 않다’라는 이유로 제작사나 투자자를 만나지 못하다가 이번에 엄청난 대히트를 치는 작품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이 드라마를 제작해준 제작사도 사람이 운영한다. 이 드라마의 투자자도 사람이다. 제작사와 투자자가 있더라도 연기자, 감독, 스태프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시청하게 될 작품은 만들어질 수 없다.


나 홀로 살 수 있다는 사람조차도 타인 없이는 살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아무렇지 않게 평범의 일상이 되어 먹고 있는 쌀 한 톨도, 드라마 한 장면도, 내가 살면서 안정을 보장받는 집도. 그 어떤 것도 타인의 도움을 받지 않은 것이 없다.



밖에 나가 사람을 만나지 않고, 하루 종일 드라마만 정주행 하며 밥만 시켜먹고 있다 하더라도

만약 타인이 없었다면, 쌀도 내가 직접 농사지어 먹어야 하고, 집도 내가 지어야 하고,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직접 다 만들어 써야 했을 것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내 손으로 다 하고 살아야 한다면,

아무리 120세 시대라고 하더라도 내가 쓸 생활필수품을 만들다 세월을 다 보낼 수도 있다.

내가 맘 편히 밥 먹고, 자고,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있는 것,

이런 평범한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자체가 타인의 도움을 받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평범함이 얼마나 귀중한 지 모른다.

가지고 있을 때는 모르는 법이다.

얼마나 무지한가, 잃어봐야 소중함을 느낀다.

나처럼…


10년 전, 당뇨 합병증으로 실명 위기가 온 적이 있었다.

너무나도 운이 좋게 자연치유로 실명위기를 벗어났다. 실명위기를 벗어나게 해 준 자연 치유 덕에 몸까지 좋아졌다. 다시 건강을 되찾고는 다시 건강을 잃게 만드는 습관으로 돌아갔다. 견디다 견디다 지친 신장이 자기의 업무에서 손을 놓았다. 그로 인해 신장의 일을 맡아해 주는 투석기계에 의존하게 된 지 7년 차이다.


부모님이 귀한 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 누구 할 것 없이 엄마 이야기를 하면 눈물이 그냥 흐른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엄마나 아빠, 부모에게 잘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앞에만 가면 투정을 부리는 나. 밖에서는 이런 딸이 있어 좋겠다고 하지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에게 더 친절을 베푸는 내 모습에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의 양심이 미친 듯이 찔리곤 한다. 그러나 내가 어떤 짓을 해도 다 받아주시는 부모님이란 걸 알기에, 막상 만나면 막 대한다. 뒤에 가서 후회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계실 때 잘할걸. 하며 돌아가신 후에 후회하는 자식들 혹은 연예인들을 많이 보게 된다.


TV에서 진행된 인문학 토크쇼에 출연한 인문학자가 물었다.

“나 혼자 산에 갔어요. 그런데 곰을 만났어요. 그때 곰이 살아날 확률이 높을까요? 인간인 내가 살아날 확률이 높을까요? 당연히 곰이겠죠.

그러나 현재 우리는 곰을 우리에 가둬놓고 지배하는 인간이 되어 있어요. 그 이유는 그 나약한 인간들이 모여 사회라는 문화를 형성하고 이뤄내어 이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이에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 이유이다.

절대 나 혼자 살아낼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 귀한 인간으로 늘 고통을 받으며 살아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원수도 사랑하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라고.

그렇게 예수님, 부처님, 공자 선생 혹은 모든 성인들의 가르침에는 인간을 귀하게 여겨라는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지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막상 그 말씀을 들을 때는

‘아, 좋은 말씀이다. 꼭 실천해야지.’

그러나 막상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마주했을 때 그 사랑과 자비의 마음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불뚝하고 올라오는 나의 성질머리에 내 자신이 한심해지곤 한다.


그럼 한번 생각해볼까.


생각해볼 사항.

나는 예수님을 절실하게 믿으면서도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으면서도 미운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무교인이라면,
사람을 존귀하게 여겨라는 가르침이 좋은 줄 알면서도, 막상 상황에 맞닿들이면 나의 감정이 우선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이토록 모든 성인들, 인문학자들의 말씀이 훌륭한 줄 알면서도 실천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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