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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문득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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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비늘 Jan 02. 2022

올해는 굳세어라

친구 가족과 함께 새해를 보내며

퇴근 후 전등이 꺼진 어두운 집으로 들어서는 기분은 묘하다. 전날 저녁 미루었던 설거지는 그대로 남아있고, 곧 버릴 생각으로 둔 소포 상자들이 구석 제자리에 있다. 양치를 하려고 든 칫솔은 곧 바꿀 때가 되었고, 밑동을 잘라서까지 깨끗이 다 써버린 치약은 메모에 적어두고도 퇴근길에 잊어버린다. 세탁소에 맡기기로 한 와이셔츠들이 들어있는 빨래통을 보며 아차 생각이 나는 것은 다반사다. 야근에 지친 나는 금방 목욕을 끝내고, 내일의 나에게 미루며 일단 잠에 들기로 한다.


자취가 익숙해진다. 알람 못 들으면 깨워줄 사람이 없고, 끼니를 굶는다고 해서 챙겨줄 사람이 없. 병원비 인으로 부담하다 보니, 한국과는 많이 다른 미국 보험공부하게 되고 요령이 생긴다. 임없이 날아오는 고지서와 통장 잔액을 비교하는 일은 이제 일상이 되었고, 서점에서 무심코 지나쳐왔던 "재테크" 책장에 꽂힌 책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타지 생활이 오래 갈수록 홀로 해결하는 것이 능숙해진다. 독립한 어른이 되어간다는 느낌에 뿌듯하면서도, 때로는 벼랑 끝에 몰린 듯한 위기감에 더해 로워하기도 한다.

늦은 시간에도 불이 켜져있는 방들이 많다.

New York 시 주민들 중에는 이 도시에서 태어나 자라온 사람들도 있지만, 거의 절반 가까이가 외국에서 태어난 이민자 출신이다. 도시는 더 나은 환경을 위하여, 더 크게 성공하기 위하여 각자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옮겨온 사람들의 터전이다. 동시에 평생 머무르지 않고 언젠가는 떠날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데, 그만큼 짧은 만남들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나는 대학교부터 쭉 생활해오면서 오고 가는 많은 사람들과 만났다. 인근 주에 가족이 있어 오가며 생활하는 이들도 적지 않으나, 대부분은 홀로 생활하며 도시를 배워간다. 그리고 그들 또한 쓸쓸해하고 두려워한다.


아무리 단단해 보이는 사람들일지라도 곁에 누군가가 필요하다. 내성적인 사람들도 평생 사람들을 안 만나고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집에 혼자 있는 것을 즐긴다 하는 사람들이 격리가 시작되면서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 사람은 사람이 필요한 것 같다. 그래서 가족과 함께 보내는 추수감사절과 같은 휴일에는 멀리 갈 수 없는 이들이 모여 "Thanksgiving" 대신 "Friendsgiving"을 보낸다. 어렸을 때 가족과의 기억을 따라 엉성하게 만든 음식들이 식탁 위로 놓이고, 그동안 바빴던 일정을 잠시 밀어둔 채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소속감을 느끼고 보호받는다는 안정감을 받는다.

작년 미국 독립기념일 친구 집으로 초대받아 다 같이 함께한 저녁이다. 어머니들의 손맛이 정말 좋았던 것 같다.

올해는 친구 집에 초대를 받아 새해를 함께 했다. 마음씨 좋으신 아저씨와 아주머니 덕분에 떡국으로 든든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기와 생선전, 나물 반찬에 열무김치까지 있는 아침상 전날 남은 음식을 데워먹는 것에 익숙해진 나에게 정말 반가웠다. 식탁 가운데 놓인 반찬들을 나눠먹으면서, 그저 밥을 먹는 것만이 아닌 즐거움을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 금방 비워낸 국그릇을 다시 담아주시는 아주머니와 여러 가지 흥미로운 주제로 대화를 이끌어가시는 아저씨의 모습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우리는 New Jersey의 인근 바닷가를 찾았다. 구 가족분들은 지난 몇 년 동안 설날 맞이 겸 이 바다를 찾으셨다고 한다. 도착했을 때는 안개비의 흐 날씨였지만, 우산을 함께 쓰고 기로 했다. 울치고는 포근한 온도에 바다 내음을 충분히 즐기며 모래밭을 거닐 수 있었다. 우리는 해변을 따라 걸으며 지나온 한 해의 기억을 되짚고, 앞으로 이루고 싶은 일들에 대하여 대화를 나눴다. 직장과 학업에서 더 좋은 결과를 위하여, 건강한 한 해를 위하여, 그리고 자신을 더 사랑하 위하여 우리는 다짐을 했다.

설날 Long Branch Beach에는 비가 조금 왔다.

오래된 해 뒤로 고, 새로운 해가 왔다. 새해 안부 인사를 주고받으며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사람들의 소식도 종종 전해 듣는다. 그리고 내가 겪는 일들에 빠져있던 나머지, 그들 또한 고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음을 다시 깨닫는다. 금 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나누었으면 어땠을까. 가끔은 함부로 속단하고 나의 목소리에만 치중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더 굳세기 위해서, 앞으로는 혼자보다 함께 가려한다. 올해는 다를 것이다. 아니, 달라야 한다.  굳센 마음으로 호랑이의 해를 맞이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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