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한가로운 시간....
늦여름이 흘러가는 신천을 걸으며...
도시의 날이 어둑어둑 저물어갈 즈음, 다소 시원한 바람이 신천의 물줄기를 따라 훅 내달려 와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바로 며칠 전의 그 후텁지근한 바람과는 훨씬 다른 느낌이다. 아! 가을이 오기는 오나 보다...
유달리 뜨겁고 지루했던 여름이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저 강물을 따라 이제 떠나가야 할 때가 많이 지났 건만, 뭐가 그리 아쉬움 남은 나그네처럼 자꾸 뒤를 돌아보는 듯 아직 한낮의 더위는 여전하다. 그래도 해가 지고 나면 가을이 "안녕~~~"하고 시원한 손짓을 한다.
이른 저녁을 먹고 아내와 함께 운동 겸 산책을 나온 길이었다. 작년에 신천 옆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 왔었다. 처음에는 매일같이 운동하러 나올 것처럼 하더니만 그다지 열심히 실행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올해는 자주 나가는 편이다.
둔치를 따라 제법 다양한 시설이 있다. 운동기구나 잔디밭에 벤치도 있고, 아이들을 위한 간이 수영장도 있고, 때로는 작은 공연도 하는 무대도 있다.
어린아이부터 젊은이, 아저씨 아줌마,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까지 뛰고, 달리고 걸으며 나름대로 저마다의 운동을 한다. 밤늦은 시간까지도 적지 않은 이들이 밤공기를 쐬며 건강과 생활의 여유를 즐기는 한적한 공간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는 한동안 걷다가 의자에 앉아 보를 타고 넘쳐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잠시 쉬었다. 물에서는 오리들이 물고기와 술래잡기를 하는지 연방 꽥꽥거리며 첨벙 대고 있었다.
신천에는 물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시에서 풀어놓고 키우는지 팔뚝만 한 잉어들이 손에 잡힐 듯이 많이 살고 있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아마 한밤중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뒤에 신천에 산다는 수달 가족이 저 맛있게 보이는 잉어들을 사냥하러 나올 게다.
신천은 그다지 크지는 않다. 비슬산 어느 골짜기에서 시작된 시냇물이 흘러 흘러 10여 Km의 거리를 달려서 금호강과 만난다.
내 어릴 적, 신천은 생활하수와 적은 물의 양 때문에 한마디로 썩은 하천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물고기는커녕 미꾸라지나 올챙이도 살기 힘든 그렇게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던 천이었다.
장마철 큰 비가 올 때면 누런 흙탕물이 제방을 넘을 듯이 넘실대며 도시의 온갖 쓰레기들, 심지어 오동통한 돼지나 닭들도 떠내려갔다.
금호강과 만나는 하류 제방 근처에 살았던 시절, 잡풀이 무성하게 자란 둔치에서 친구들과 공을 차다가 잘못찬 공이 물에 빠지기라도 하면 어쩔 수없이 신발을 벗고 공을 건지러 그 더러운 물에 발을 담가야 했다. 어린 마음에 물이 더럽다는 생각보다 아마도 축구공이 더 소중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제방의 한쪽을 도시고속도로인 '신천대로'로 만들고, 하수정화시설도 갖추고, 신천을 살리려는 노력들이 오늘날 깨끗한 물이 흐르는 도심의 공원으로 바뀌게 되었으니.... 심지어 철새나 수달도 찾아오게 되었다고 하니... 시민의 한 사람으로 더없이 반가운 마음이다...
지난번, 빗방울이 추적추적 떨어지던 날, 덤불 속에 숨어있는 길양이를 보고 가여운 마음이 발동한 아내는 곧바로 다음날 고양이 사료를 사서 찾아가는 측은지심을 보이기도 했다. 딸과 함께 사는 '홍시' 생각이 났을 게다. 그 길양이는 사람들을 경계하지도 않고, 도망가지도 않았다고 한다. 아마 그를 예뻐라 하는 사람들의 눈길과 손길에 익숙해졌는가 보다... 그러면서 가져다주는 먹이도 얻어먹고... 그것이 그 길양이의 살아가는 방식이겠지...
신천은 사람들의 휴식이나 운동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사람보다 더 많은, 이름 없는 동물들이 살아가는 터전일 게다...
어느새 어둠이 짙어진 가운데 우리는 다시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아직도 여름이라고 우겨대면서, 여전히 떠나지 않고 나무에 매달려 맴맴 울어대는 매미들 소리에 섞여 전자건반을 두드리며 노래하는 총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걷는 중동교 너머 상류 쪽에는 아무래도 사람들이 적어서 자신의 노래를 들어줄 관객도 적을 텐데... 그는 열심히 건반을 두드리며 버스킹을 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그다지 노래를 잘하는 거 같지는 않은데... 사람들 앞에서 무대에 서는 연습을 하는 건지... 나는 그 앞을 지나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려 했더니, 아내가 재빨리 내 손을 끌며 걸음을 서두르는 게 아닌가... 마치 우리가 그의 노래를 방해라도 하는 양...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래하는 그의 앞에 서서 우리가 그를 잠시라도 지켜보고 있었다면,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이나 얻으려 했던 것에 조금이라도 일조를 하지나 않았을는지... 이것은 우리만의 생각일 뿐... 그는 정말 남들 앞에서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등 뒤에서 노랫소리가 멀어져 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신천을 지난 저 작은 물줄기는 저 멀리 금호강과 만나 강물이 되고, 흘러 흘러 낙동강과 만나서 남으로 남으로 시간이 되고, 세월이 되어 남해 바다로 유유히 흘러갈 것이다. 그렇게 가는 동안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홍수도 나고, 가뭄에 허덕이는 일도 있을 게다. 보를 만나 멈추었다가 가야 할 일도 있을 테고, 농사를 위해 몸을 나누어야 하기도 하고, 더러운 것들을 품어 안아야 하고, 강을 터전 삼는 수많은 생명들을 키우기 위해 잠시 걸음을 멈추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생은 강물과 같다고 했던가... 강물처럼 흘러가는 인생... 급할 것도 없고, 부딪치면 피해 갈 줄 알고...
흐르는 강물처럼 산다는 것... 정말 자연스럽게 산다는 건 어려운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