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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철 Jun 17. 2024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의 딱정벌레


나는 이른바 선사들이 토굴 속에서 수년 동안 참선을 하면서 마침내 무언가 깨달았다고 할 때 그것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 오랜 수행 끝에 그들이 우주 만물의 통일적 원리인지 혹은 삶의 궁극의 원리인지를 발견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물론 그들이 치열한 수행 끝에 강렬한 확신이나 체험을 얻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의 생각일 뿐 그것 자체가 보편화되고 객관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쉽게 말하면 사적 체험일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깨달음을 판정해 주는 구루(Guru)가 있다고 해도, 그 구루가 깨달은 자(Buddha)라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구루가 깨달은 자라는 것을 다른 구루가 판정해 준다고 하자. 하지만 이런 물음을 제기하다 보면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나타나는 ‘제3자 논변의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근거 지우는 것을 새롭게 근거 짓는 것의 무한 퇴행 문제이다. 결국 유한자들에서 무한자이자 궁극적 해결사인 신에 이를 때는 일종의 근거 지움이 아니라 점핑(jumping)이 일어난다.


비트겐슈타인의 ‘딱정벌레’도 비슷한 딜레마를 보여준다. 자기 만이 상자 속의 딱정벌레를 보았다고 하지만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딱정벌레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 각각이 보았다는 말을 최종적으로 근거지울 수 있는 근거가 없다. 사실 학자들이나 과학자들은 빼어난 저서들이나 과학적 발견들을 통해 자신들의 궁극의 연구 결과를 보여줄 수 있고, 예술가들도 그들의 작품을 통해서 그리고 기술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이 생산한 기술을 통해서 보여줄 있다. 하지만 깨침을 상징하는 상자 속의 딱정벌레는 누구도 확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백분 양보를 해서 그런 깨달음의 존재에 대해 인정도 하지 않고 부정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그런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치열한 수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엄연한 '팩트'로 인정을 한다. 그런데 이런 팩트는 다른 분야의 사람들도 똑같이 한다. 이를테면 최고의 경지에 이르고자 노력하는 운동선수들도 일반인들이 상상하기 힘든 노력을 하는 것이다.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예술가도 그렇고, 문자를 통해 최고의 작품을 쓰고자 하는 학자의 경우들도 틀리지가 않다.


깨친 자의 깨달음에 심오한 형이상학적 원리에 담겨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지한 자들이 갖는 신비감이고 그릇된 신앙일 뿐이다. 때문에 깨달음을 가장한 자들이 몽매한 대중들을 데리고 사기 치는 경우는 역사에서 수도 없이 많이 있었다. 이런 오류나 그릇된 믿음에 빠지지 않기 위해 혹은 궁극의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깨달음이 진정 무엇인가?”라는 절박한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이를테면 “도道가 무엇인가?” “부처가 무엇인가?” “달마는 왜 동쪽으로 왔는가?” 등 특정한 문제를 가지고 싸울 수도 있고, 만공 스님의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처럼 오직 하나(一)를 잡을 수도 있고, 아예 그도 저도 아닌 ‘이 모꼬?’와 같이 무자화두(無字話頭)를 가지고도 수행 정진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물음들이 도달하는 것이 무엇일까? 무나 도가 실체가 없듯, 깨달음의 실체도 없고 내용도 따로 없다. 칸트가 현상을 초월한 물자체(Ding an sich)의 세계를 말했지만, 도대체 현상으로 드러나지 않는 본질이 어디에 있고, 본질을 담지 않은 현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장막 뒤에 무언가 있을 것이라고 들추어 보지만 그저 어둠뿐이 없는 것이다. 현상과 본질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깨달음과 일상도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불교의 언어로 말하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가 오랜 수행 끝에 깨달은 것이 무얼까? 나는 아주 단순하다고 본다. 부처는 생(生) 속에 담긴 고(苦)를 본 것이고, 그것을 벗어나는 방법(해탈)을 보여준 것이다. 이런 통찰과 깨달음은 너무나 단순한 것이다. 이 단순한 통찰과 단순한 해법을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때문에 부처는 입적을 할 때 자신이 평생 설법한 8만 법문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예수도 마찬가지이다. 예수가 산상수훈에서 던졌던 메시지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일까?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너무나 단순하다. 예수의 메시지는 너무나 분명하다. 그저 '사랑'이란 말이다. 구약이 '정의'를 세우고자 했다면 예수로부터 시작하는 신약은 '사랑'이 알파요 오메가이다. 사랑만이 우리가 삶을 지속할 이유이고,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 사랑을 위해 스스로 십자가의 고통을 짊어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양의 공자의 정신도 그리 복잡할 것 없다. 공자가 말한 인(仁)은 부처가 말한 자비와 예수의 사랑과 표현 언어는 달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 모두가 베풀과 보살핌의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고, 우주 만물에까지 확장을 한다고 하면 생육의 도와 다르지가 않다. 남송의 주자는 리(理) 가 우주 만물의 원리라고 하는 태극도설(太極圖說)을 끌고 들어와 공자의 말씀을 형이상학의 차원으로 체계화해서 성리학을 세웠다. 조선의 선비들은 오로지 그것만이 공자의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공부를 했지만 그들은 공자의 말을 너무 번쇄하게 만들고 너무 추상화시켰을 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공자의 사상은 너무나 단순 명확한 인(仁)에 다 들어 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 속에서 남을 내 몸처럼 생각하고, 나를 남들 속에서 보려고 하는 태도이다. 이것은 교양인이라면 누구든지 알 수 있고, 선한 마음을 갖는 자라면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는, 지극히 단순한 말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대접받고자 하는 바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과 같다. 세분 성인의 말씀이 이처럼 단순 명확한 것은 그들 모두가 삶에서 진실을 끌어 올렸었고, 삶에 깊숙이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석가나 예수, 그리고 공자와 같은 성인들이 말씀한 이 단순한 원리가 후대로 갈수록 복잡한 교리로 체계화되고 형이상학적 원리로 추상화되고, 신비한 언설로 간주돼 삶과 유리되고 만 것이다. 그런 필연적 이유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참으로 본질을 볼 수 있어야지 똥폼이나 잡고 허접데기 껍데기만 붙잡고 있으면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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