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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철 Oct 16. 2024

남명 조식 선생의 덕천서원/산천재 탐방기


<한국의 사상가 탐방회>의 2번째 탐방은 지리산 산청에 위치한 덕천서원과 산천재이다. 어제 휴일인 한글날(10.09)을 넘기고, 평일인 목요일에 출발했다. 가급적 차가 막히지 않아야 장거리 운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새벽에 일어나 간단히 준비를 한 다음 6시에 파주의 집을 나섰다. 아직 어둠컴컴해서 차가 막히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것이 오산이었다. 외곽 순환도로는 비교적 잘 빠졌는데 구리 톨게이트를 지날 때 차가 많이 막혔다. 이곳을 통과하는 데만 무려 30분 이상이 걸렸다. 용인에서 정박사를 픽업한 시간이 예정한 시간 보다 30분 정도 넘었다. 정박사는 유라시아 대륙을 제집 드다들듯 하는 고고학자이다. 마침 시간이 돼서 이번 남명 선생 탐방회에 동행 하는 것이다. 용인에서 픽업을 할 때 많이 늦었는데, 네비 안내하는 대로 가다 보니 경부 고속 도로를 타는 것이 아니라 호법 IC 쪽으로 유도하는 바람에 중부 고속도로를 탔다. 이 쪽 도로도 많이 막혀서 이래 저래 약속한 11시까지 가기는 힘들게 됐다. 가는 길에 산청에서 만나기로 한 팀에게 연락을 했더니 거진 도착을 한다고 하면서 천천히 오라고 한다. 다행히 청주를 통해 경부 고속도로에 들어서니까 차가 잘 빠진다. 날씨도 전형적인 가을 날씨라서 청명하다. 중간에 덕유산 휴게소에서 한 번 쉬고는 빠른 속도로 달렸다. 산청 덕천서원에 도착한 시각은 거진 12시가 넘었다. 지리산 자락 안에 있어서 공기가 서울에서 맡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일단 점심 때라 미리 와서 기다리는 팀하고 읍내의 한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맛있는 밑반찬들이 풍성하게 나와 이것 저것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다시 덕천 서원으로 돌아왔다. 이곳은 15-6년 전 진주에서 <연세철학연구회> 모임을 가질 때 가는 길에 한 번 들른 기억이 있어서 새롭다. 사원 자체는 그 당시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지만, 건물 주변은 잘 단장을 해 놓아서 산 속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서원 앞에는 유명한 배롱 나무가 있어 볼만한데 우리가 갔을 즈음에는 꽃들이 다 져서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 그 자체 만으로 장관이다. 대신 바로 옆의 감나무에는 빠알간 감들이 주렁 주렁 달려 있다. 도로 건너편에는 개천 가에 세워 놓은 세심정이 옛 자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턱이 높은 문을 들어서니까 정면에 덕천서원이란 현판을 단 경의당이 보인다. 이곳은 대청마루를 두고 앞 뒤가 뚫려 있어서 여름에는 아주 시원해 보인다. 넓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배롱나무들이 어러 그루 서 있었지만 그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는 없었다. 대신 가을 하늘이 워낙 맑고 공기도 좋아서 전체적으로 밝아 보인다. 우리는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천천히 구경을 했다. 마침 이곳에서 해설사로 근무하시는 분은 연세대 사회학과 74학번이어서 반갑게 인사를 하고 남명 조식 선생 관련 이야기들을 재밌게 들을 수 있었다. 그 분은 오로지 남명 선생에 꼿혀서 이곳에 정착을 했다고 한다. 



본래의 서원은 여러 차례 수난을 겪었다. 무엇보다 홍의장군 곽재우를 위시한 남명 선생의 제자들 47명이 임진 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일본은 1597년 정유재란을 다시 일으켜 재침략을 할 때 진주성을 함락시키면서 수많은 인명들을 살해했다. 이때 의병장들을 많이 배출한 남명의 덕천서원도 일본군의 눈에 밑보여 불에 전소됐다고 한다. 현재 있는 건물은 19세기에 다시 지은 것이다. 남명 선생을 대할 때 가장 먼저 떠 오르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남명은 어떻게 일본의 침략을 예상했고, 그의 제자들에게 병법을 가르칠 수 있었을까? 남명은 젊은 시절 살았던 김해나 나중에 정착한 지리산 등은 남해안과 가까워서 수시로 왜적들의 침략에 시달렸다. 남명도 그런 왜적들의 행태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중앙의 조정관료들과 달리 왜적의 위험을 생생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그의 수많은 제자들이 전란을 맏아 의병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이런 현실에 대비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다만 남명 역시 다른 조선의 선비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을 오랑캐 나라로만 보고 그 잠재력에 대해 과소평가한 것은 아쉽다. 조선을 벗어나 동북아 3국 전체를 비교해서 볼 수 있는 시각을 당시의 선비들이 갖춘다는 것은 모화 사상의 한계와 정보의 제약 때문에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양대 전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18-9세기 청을 다녀간 조선의 실학자들을 제외한다면 국제적 시각을 가진 선비들은 거의 드물었다는 현실은 그 자체 연구감이라 할 수 있다. 



남명이 이기론을 위시한 조선의 선비들의 형이상학적 논쟁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이고 비판적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실제로 퇴계 이황에게 냉소적인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빗자루질 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를 말하며, 이름을 도둑질하고 세상을 속이려 합니다. … 이는 선생 같은 어른이 꾸짖어 그만두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십분 억제하고 타이르심이 어떻겠습니까?”



이는 논쟁에 한편으로 열중한 선비들이 눈앞의 현실도 모르는 것을 개탄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퇴계 역시 그 책임을 면키 어려우니까 그만 손을 빼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학문을 함께 한 도반이라 할 지라도 이런 권면을 하기가 쉽지 않은 현실을 본다면 남명의 기개가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남명의 권고에 대해 노련한 퇴계는 이렇게 답신을 보낸다. 



“배우는 사람들이 명성이나 도둑질하고 세상을 속이는 것에 대한 근심은 그대 혼자만의 근심이 아닙니다. … 본래부터 그런 것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만약 세상에서 우려하는 바를 범했다는 이유로 꾸짖어 그만두게 한다면 이는 천하 사람들이 道를 지향하는 길을 끊어버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퇴계는 남명의 지적이 일견 옳다 해도 그 길을 막아 버린다면 학문의 자생적 발전 자체를 막을 수도 있다는 우려를 표시했다. 사실 조선의 형이상학적 이기론이나 사단칠정 논쟁들은 서양 중세 1,000년을 끌어온 ‘보편 논쟁’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서양 철학의 태생지인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한 보편 논쟁은 보편이 우선 하느냐 개별이 우선 하느냐, 무엇이 참다운 존재이고, 양자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형이상학적 논쟁이다. 이러한 논쟁이 수도원과 중세 대학을 중심으로 워낙 오랫동안 비현실적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서양에서도 이를 두고 ‘탁상공론’(scholastic)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다. 하지만 서양 근세의 경험론이나 합리론의 발전도 보편 논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조선의 이기론도 이와 비슷하지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이런 비현실적 형이상학적 논쟁이 현실의 당파를 이루고 권력 투쟁을 야기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노론과 서론, 남인과 북인 등 후대로 가면 그 노선 확인도 쉽지 않은 당파들이 당쟁을 일삼고, 상대를 사문난적으로 몰아서 3대의 씨를 말렸던 사화들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조선의 이기론이나 사단칠정론 그리고 예송 논쟁 등은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논쟁만이 아니라 가장 현실적인 권력을 둘러싼 투쟁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토 대학 교수인 오구라 기조가 <조선은 하나의 철학이다>라는 책을 통해 ‘이(理)’를 둘러싼 논쟁이 거대한 현실 권력 투쟁임을 밝힌 것은 대단히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런 싸움은 21세기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진영 논리 간의 죽자 사자하는 싸움에 그대로 연장되고 있는 것이다. 



남명이 선비들의 논쟁을 회피한 데는 공맹과 주자를 통해 유학의 이론이 완성되었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그는 자신이 유학의 이론에 새로운 것을 더하기 힘들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여기서 밝혀진 유학의 정신을 현실에서 실천하는 데 더 관심을 가졌다. 남’명의 이런 태도는 관념의 유희’ 보다는 ‘’경과 의’에 기반한 무실 역행’에 더 힘쓰겠다는 현실주의적 판단이라 할 수가 있다. 그는 과거 시험을 포기하고 낙향해서 초야에 있을 때도 추상같은 상소를 통해 조정의 정치를 비판했다. 남명이 명종에게 올린 <단성소>를 보면 그의 강직한 성품을 짐작해볼 수 있다. 



“전하의 국사가 그릇된 지는 이미 오랩니다. 나라의 기틀은 이미 무너졌고,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났으며, 백성들의 마음 또한 이미 전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비유컨대 큰 나무가 100년 동안이나 그 속을 벌레한테 파먹혀 진이 빠지고, 말라 죽었는데도 그저 바라보기만 하여 폭풍우가 닥치면 견디어 내지 못할 위험한 상태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실정에 있은 지가 오랩니다. 소관들은 아래서 히히덕거리며 주색이나 즐기고, 대관은 위에서 거들먹거리면서 오직 뇌물을 긁어 모으는데 혈안입니다. 뿐만 아니오라 내신들은 파당을 세워 궁중의 왕권을 농락하고 외신들은 향리에서 백성들을 착취하여 이리떼처럼 날뛰면서 가죽이 다 닳아 없어지면 이치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신은 깊이 생각해보면 탄식만 길게 나올 뿐, 낮이면 하늘을 우러르기 수차례였고, 눈물과 한숨을 누를 길 없어 밤이면 잠 못 이룬 지가 오랩니다. 나라가 이 지경이고 보면, 자전대비(慈殿大妣)는 밖의 소식이 막힌 깊은 궁궐 안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나이어린 선왕의 한 외로운 자식일 뿐입니다. 저 많은 천재, 천갈래 만갈래로 흩어진 민심을 무엇으로 막고, 어떻게 수습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런 때를 당해서 비록 재주가 주공(周公)과 소광(召公)을 겸하여 삼공의 위치에 있다 해도 손을 쓰기 어려운 형편이온데, 하물며 미신(微臣)과 같이 아무 힘도 없는 자야 더 말해 무엇하리이까.”



왕정국가에서 재야의 한 지식인이 대왕 대비를 ‘궁궐 안의 한 과부’로 부르고, 어린 왕을 ‘나이어린 선왕의 한 외로운 자식’이라 부르면서 질책한 것은 현대의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도 쉽게 말하기 힘든 표현이다. 가히 지조가 강개한 남명 선생이니까 가능한 말이다. 



남명이 이론 보다는 실천에 역점을 두다 보니 저술이 극히 드문 것은 사실이다. 남명의 제자들은 퇴계의 제자들과 달리 조정에 관료로 진출한 사람들이 적었다. 남명학파를 적극 일으켜 세운 정인홍이 참수의 변을 겪은 뒤로는 더욱 쇠락하고 말았다. 현대에 이르러 남명의 사상을 재 발굴된 데는 김충렬 선생의 역할이 크다. 그에 의하면 남명이 쓴 글의 총량은 현대 학자들의 논문 2-3편 정도라고 할만큼 적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남명이 성리학의 근본 정신을 모르거나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그는 문자로 직접 책을 쓰는 대신에 선유들의 책을 읽으면서 의미있고 중요한 구절들을 발췌한 『학기류편(學記類編)』과 성리학의 핵심 이론을 도상으로 그린10 여 개의 「학기도」 를 남긴 바 있다. 전자를 보면 남명의 독서량이 적지 않고, 후자의 도상을 보면 남명의 사상 이해가 결코 가볍지 않다. 남명 사상의 핵심은 「경과의(敬‧義)」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선생에 따르면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이 敬이고,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이 義다.[內明者敬 外斷者義]”라고 하였다. 



《주역》의 4대 난괘 중의 하나인 택수 곤괘(坤卦)에 보면 “군자는 경으로 내면을 곧게 하고, 의로써 외면을 바르게 한다.[君子 敬以直內 義以方外]” 는 말이 나온다. 곤(坤)은 곤란하다거나 곤경스럽다는 표현에서 보듯, 주체가 처한 상황에 어려움을 나타낸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군자는 구차하게 변명하거나 호도하지 않고 안을 경(敬)으로 다스리고, 밖은 의(義)로 바로 세운다. 간단히 말하면 어려운 상황일 수록 자신을 보듬어 실력을 키우고 밖으로는 정면 돌파를 시도한다는 의미이다. 남명은 이런 경과 의의 사상을 자신의 안팎을 살피는 핵심 지주로 삼은 것이다. 敬이 개인의 수양론[修己]이라면 義는 현실의 실천론[治人]에 가깝다. 심성론인 敬을 도모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영역인 義까지 확장한 것은 남명 사상의 독특함이었다. 남명은 늘 자신을 경계하기 위해 성성자라는 방울을 달고 다녔고, 경의도라는 짧은 칼을 품고 다녔다. 마치 조선의 부녀자들이 절개를 지키기 위해 은장도(銀粧刀)를 가슴에 품고 다니던 것과 같다. 남명의 이런 자세는 조선의 선비의 전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제자들 중 48명이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나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남명은 이런 자신의 경의 사상을 간단 명료하게 표현하기 위해 직접 「신명사도(神明舍圖)」라는 도상을 그렸다. 이 도상은 군자의 마음을 운행과 단속을 그린 그림이다. 상단에 태일군이라는 마음이 있는데, 이 마음은 한 나라의 왕처럼 해와 달로 상징되는 왕도와 천덕을 지킨다. 그는 목숨을 받쳐 사직을 지켜야 하므로 늘 솔선해서 깨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탱해주는 것이 경( 敬)이라 할 수 있다.「신명사도」를 미루어서 보아도 확실히 남명 선생은 이론가 보다는 실천가에 가깝다. 이론가들은 꼼꼼한 해석에 주목하지만 실천가들은 큰 틀에서 하나의 행동 지침을 세워 놓고 그것을 현실화하는 방법에 관심을 갖는다. 도상은 그런 지침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햄릿처럼 우물쭈물 거리지 않고 신속하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덕천서원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는 남명 선생이 제자들에게 강론을 펴던 산천재가 있다. 멀리 천왕봉이 보일 정도로 지리산 자락으로 둘러 쌓인 곳의 평지에 세운 산천재는 자그마한 별채처럼 만들어져 있지만 공부하고 강의하기에는 그만으로 보인다. 본래 합천 출신의 남명 선생이 젊은 시절 김해 처가 근처에 산해정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산청으로 이주를 하면서 터를 아주 잘 잡은 것 같다. 이곳은 그야말로 조정 관료들과 거리를 두면서 은거도 하고 강론도 할 수 있는 처사로 지내기는 그만인 곳이다. 젊은 학자들은 도시에서 동료들과 경쟁을 하며 학문을 닦아야 겠지만, 중견 학자들은 도시에서 물러나 조용히 자기 나름의 이론 체계를 정립하는 데 힘을 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남명은 오늘 날의 학자들에게도 하나의 귀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경기도 파주에서 지리산 산청까지 하루에 이동한다는 것은 젊은 이들도 쉽지 않을 듯하다. 그런데 이제 70이 코앞에 닿은 내가 이렇게 운전을 한다는 것은 무리가 따를 수 있다. 올라오는 길이 많이 피곤했지만 그래도 함께 간 정박사와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한 덕분에 졸음 운전을 피할 수 있었다. 그를 용인에 내려주고 한 시간 여를 더 달려 파주에 도착을 하니까 이미 오후 11시를 훨씬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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