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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철 Nov 11. 2024

우리가 몰랐던 고구려사

역사 칼럼니스트 정재수 선생이 일전에 <우리가 몰랐던 백제사>(신아출판사, 2024)를 보내줘 잘 읽은 적이 있었는데 얼마 되지도 않은 사이 <우리가 몰랐던 고구려사>(신아출판사, 2024)년을 보내 주었다. 페이스 북에서 늘 백제 사와 고구려 사에 관한 포스팅을 하고 있어서 선생의 왕성한 필력에는 비교적 친숙하지만, 단 1년 사이에 볼륨이 적지 않은 역사서 2권을 출판한 것이다. 요즘은 전문 학자들 이상으로 분야 별 에크리뱅들의 저술 역량이 훨씬 감탄스러울 정도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고 개국한 조선은 국가의 이념을 성리학에 정초하고 중화 사대를 표방 함에 따라 중원은 먼 나라의 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 땅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후예들이 말 달리고 활을 쏘던 곳인데, 이제는 한국인들에게 선사시대의 신화 정도로 치부될 뿐이다. 그렇게 된 데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입장과 사대주의 사관에 따라 기술한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중화 사대주의에 갇힌 조선의 선비들 탓이 크다. 지금은 좁은 한반도에서 남북이 갈라져 남한은 적어도 공간 적으로는 대륙과 단절돼 그야말로 섬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쉽고 너무나 분통한 일이다. 한반도의 국운이 크게 뻗치고 있지만 지금의 공간적 한계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만일 남북이 다시 통일될 기반이 조성된다면 그 옛날 드높은 고구려의 기상을 함께 되살릴 일이다.


역사 칼럼니스트 정재수 선생의 <우리가 몰랐던 고구려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흥미롭다. 무엇보다 우리 모두가 알고 싶어 하지만 제대로 알려주는 책들이 없는 상태에서 고구려 사에 관한 책이다. 둘째는 대중서임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나 고구려 사략 등 다양한 사서 원전들을 비교해서 고구려 사를 해석하는 저자 나름의 입장을 분명히 제시한다. 세 번째로는 방대한 유적 사진과 도표를 통해 비교적 쉽게 고구려 사에 접근하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고구려 사에서 세 가지 부분이 잘못 이해되고 있다고 말한다. 다소 길지만 저자의 문제의식이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저자의 말을 인용한다. “첫째는 왕도의 위치 문제다. 고구려 출발의 기준점인 초도 홀승골성을 비롯하여 이후 천도하는 왕도의 소재지가 대부분 길림성 환인현과 집안현 일대로 비정되고 있다. 둘째는 고구려의 강역 문제다. 고구려는 초기 대무신왕 시기 중국 화북성 북경 일대를 점령하며, 태조왕 시기 후한의 침입에 대비하여 서쪽 변방의 요서 지역에 10개 성을 쌓는다. 당시 고구려와 중원왕조의 경계는 지금의 중국 요녕성과 하북성을 나누는 연산 산맥이다. 그러나 현재의 고구려 강역 지도는 고구려와 중원 왕조의 경계를 연산산맥에서 동쪽으로 300여 Km 떨어진 요녕성 요하 일대로 설정하고 있다. 셋째는 고분의 무덤주인 문제다. 길림성 집안현과 북한 평양 일대에 소재한 수많은 고구려 고분 중에서 왕릉 급으로 분류된 무덤의 주인공을 특정하지 못하고 있다.”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은 한반도의 초기 역사를 왜곡 부인하고, 한반도인들의 공간적 활동도 가급적 한반도를 넘어서지 못하도록 기술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낙랑군 위치를 평양에 비정한 것이고, 사대주의 역사기술의 원조격인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 조차 신빙성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다. 이런 역사관의 폐해는 두고 두고 우리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우리가 몰랐던 고구려사>는 고구려사를 기술하면서 곳곳에서 이런 역사관을 부정하고 주체적인 우리의 역사관을 정립하기 위해 애를 쓴 흔적을 보이고 있다.


<우리가 몰랐던 고구려사>는 전작인 <우리가 몰랐던 백제사>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방편으로 10 가지의 질문을 던진다.


① 고구려는 해씨왕조인가? 고씨왕조인가?

② 초도 홀승골성은 환인 오녀산성인가? 북진 의무려산인가?

③ 고구려 추모(주몽) 신화가 북부여 동명신화를 차용한 이유는?

④ <삼국사기>가 한의 낙랑군 위치를 한반도로 설정한 이유는?

⑤ 태조왕의 시조 태조는 건국시조의 시호인가?

⑥ 동천왕, 중천왕, 서천왕, 미천왕 등이 천(川)자 시호를 쓴 이유는?

⑦ 국내성은 Capital city인가? Necro Polis인가?

⑧ <삼국사기>가 <광개토왕릉비> 정복 사업을 기록하지 않은 이유는?

⑨ <광개토왕릉비>에 등장하는 한반도에 존재한 왜의 실체는?

⑩ 장수왕의 천도지 평양은 평안도 평양인가? 요녕성 요양인가?


지금까지의 고구려 역사와 관련한 10가지 질문은 고구려를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역사적 사실의 미로를 탐색하는 ‘아드리안느의 실’인 동시에 이런 문양제가 발생한 원인을 밝히는 작업이다. 필자는 그것을 춘추필법으로 무장해서 중국 편향적인 사서들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한 <삼국사기> 탓으로 돌린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일제 강점기 남당 박창화 선생이 일본 왕실 도서관에서 필사해온 <남당필사본>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강단 사학계는 진작에 이 책을 위서로 규정했지만, 필자에 따르면 이 책은 삼국사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기록 자체가 방대하고 상세하다. 태생이 식민사관인 강단사학계가 이런 소중한 책을 위서로 규정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한국인들의 사상적 뿌리라 할 수 있는 천부경과 우리 역사의 내력을 밝힌<환단고기>도 깡그리 위서 목록에 집어 넣고 학술적인 정당한 평가를 외면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책에서 시도한 필자의 노력은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함이 없다.


이 책은 1. 건국과 국통의 계승, 2. 고씨왕조의 출발, 3. 국내지역  천(川)자 왕들 4. 중시조 미천왕과 계승자 5. 위대한 정복군주 광개토왕 6. 수성과 중흥의 갈림길 7. 수당과의 패권전쟁, 멸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목차가 하나 같이 흥미롭지만, 지면 상 그리고 역사에 관한 한 일반인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상 관심 갖는 몇 가지만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이 책을 보면 고구려가 <삼국지>로 잘 알려진 중원의 역사와 얽혀 있는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나 있다. 때는 고구려의 동천왕 시절이다. 이 때는 조조 사망 후 그의 아들 조비가 낙양에서 위를 건국하고, 유비는 촉한을 건국하며, 양자강 중하류를 차지한 손권은 오를 건국하면서 본격적으로 패권 전쟁을 벌인다. 그리고 대륙의 동북방에는 공손씨 정권이 4대째를 이어 오고 있다. 대륙의 삼국은 패권 전쟁의 유리한 고지를 세우기 위해 공손씨 정권과 고구려를 끌어들이기 위해 적극 노력한다. 고구려 역시 이들 삼국과 적극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개입한다.  만일 고구려의 국력이 약했다고 한다면 이런 관계가 성립하기 어렵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러니까 삼국지는 엄밀한 의미에서 오국지로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광개토왕에 관한 이야기는 참으로 흥미진진하다. 광개토왕이 정복 군주로서 고구려의 영토를 확장하는 데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역사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는 의도적으로 무시되고 폄훼되어 있다. 그것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입장과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역사관 때문이다. 광개토왕의 전승 기록은 <광개토왕릉비>가 발견되고, <고구려사략>의 상세한 기록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광개토왕릉비>에 드러난 광개토왕의 정복 사업은 비려, 왜잔국, 백신, 신라, 왜적, **, 동부여다. 이 책의 262 쪽에는 상세한 지도가 실려 있다. (사진 참조) 이 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영락 6년 왜잔국 정벌> 부분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사건은 한반도 역사의 물줄기를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광개토왕은 396년 몸소 수군을 이끌고 서남부 지방에 위치한 왜잔국(倭殘國)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당시는 양강인 고구려와 일본이 백제와 신라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영향력을 확충 하던 시기다. 일제는 <광개토왕릉비> 탁본을 가지고 편집한’ 쌍무가목본’을 가지고 왜가 신묘년에 건너와 백잔과 신라를 파했다는 증거로 삼았다. 그들은 이를 근거로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쪽지방을 점령 통치했다고 하는, 이른바 ‘임나본부설’을 주장했다. 일제의 식민지를 정당화하기 위한 식민사관의 결정체이다. 하지만 이 사건의 본질은 한반도 서부로 남하한 부여기마족의 후예들이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아 다시 일본열도로 넘어가 ‘야마토’ 정권을 탄생시킨 것이다. 여기 나오는 ‘왜’는 일본의 왜가 아니라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왜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 고구려가 대륙의 통일 왕조인 수/당과 국운을 건 전쟁 이야기를 해보자. 이 전쟁은 고구려의 영양왕이 수나라를 공격한 598년부터 최종적으로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668년 까지 70여년에 걸친 동북아의 패권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수와 당은 당시 세계 최강의 국가라 할 수 있는데 그와 맞서 싸운 고구려를 변방의 작은 국가로 생각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수나라는 4차에 걸쳐 수백만 이상의 군대를 동원해 고구려를 침략했지만, 을지문덕의 살수 대첩 등 여러 차례의 전쟁에서 패배를 하고 결국은 멸망했다. 그 뒤를 이은 당태종도 고구려를 속국으로 삼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30만 이상의 군대를 동원해 고구려를 침범했지만 안시성의 양만춘을 넘지 못했고, 그 뒤에는 연개소문의 귀신같은 전략에 말려서 패퇴하고 말았다. 오늘 날 기준으로 생각하면 한반도의 조그만 국가가 세계 최강인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서 여러 차례 완전 승리를 거둔 것이나 다름없다 할 것이다. 하지만 오랜 전쟁으로 인구 3-4백만 정도 되는 고구려의 국력 손실이 컸고, 연개소문이 죽은 뒤로는 그의 아들 3형제 간에 불화로 인해 내부 손실이 컸고, 마침내 나당 연합군의 양쪽 공격으로 인해 700년 역사를 마감하고 말았다. 두고 두고 아쉬운 일이었다. 만일 고구려가 신라를 회유하고 백제와 힘을 합칠 수 있었다고 한다면 한반도의 역사도 크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아무튼 대륙에 까지 미치는 사방 수 천리의 땅을 경영한 고구려의 정신과 기상은 통일 국가를 위한 초석으로 삼아야 되지 않을 까라는 생각이 크다.


<우리가 몰랐던 고구려사>에 대해 간단히 소개만 하려던 것이 길어졌다. 아무튼 이 책은 전문 서적 못지 않게 상세한 동시에 삽화나 수많은 사진들을 곁들여서 가독성이 좋고, 무엇보다 우리의 고대사의 왜곡된 진실을 밝혀서 제대로 정립하고자 하는 필자의 노력이 가상하다. 부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나는 며칠 에 걸쳐 꼼꼼히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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